‘인생 낭비 죄’와 코코넛 자루

by 까칠한 서생


너는 네 죄명을 알고 있다.
네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다.
나는 너를 ‘인생을 낭비한 죄’로 단죄한다.
그에 대한 형벌은 죽음뿐이다.
— 영화 <빠삐용>(1973) 중 재판관의 대사 —



1.

살인 누명을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사내, 빠삐용은 꿈속에서 기괴한 재판을 받는다. 그는 절규한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소!” 하지만 재판관은 차갑게 응수한다. 단죄 이유는 살인죄가 아니라 ‘인생 낭비 죄’라고.


이 장면은 볼 때마다 당혹스럽다.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그 귀한 젊은 날을 차가운 감옥에서 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생에 대한 크나큰 ‘낭비’라는 판결이다. 억울한 누명보다 더 잔인한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조차 결국 내 책임이라는 이 서슬 퍼런 선고다. 빠삐용 역시 그 부정할 수 없는 결과 앞에 고개를 숙이며 ‘유죄’를 인정한다.



2.

나는 판사가 꾸짖은 ‘낭비’의 해답을 그의 ‘마음의 행방’에서 찾는다. 판결 이전의 빠삐용은 오로지 ‘복수’와 ‘누명 벗기’라는 과거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 몸은 담장 밖으로 나가려 애썼지만, 마음은 여전히 자신을 가둔 자들에 대한 증오라는 감옥 안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주어진 생을 자신의 가치를 세우는 데 쓰지 못하고 타인이 준 상처를 곱씹는 데 허비한 시간, 그것이 바로 그가 인정한 유죄의 본질이었다.

3.

이 대목에서 나는 신영복 선생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보여준 성찰을 떠올린다. 선생은 20년이 넘는 수용 생활 속에서도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줌에서 생의 의미를 길어 올렸다. 그에게 감옥은 인생을 낭비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공부의 공간’이었다. 타인이 강제한 수형의 시간을 주체적인 사유의 시간으로 치환함으로써, 담장 안에서도 이미 인생 낭비 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정신적인 탈출이었다.


4.

‘유죄’를 인정한 이후 빠삐용의 탈출 기획은 한층 치밀해진다. 그는 절벽 아래 바다를 응시하며 일곱 번째 파도가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만든다는 법칙을 깨닫고, 코코넛 자루를 엮어 ‘자유의 부력(浮力)’을 준비한다. 우리 삶에도 무모한 투신이 아닌, 나만의 ‘일곱 번째 파도’를 기다리며 응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한다. 나만의 항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에게 세월은 더 이상 낭비가 아닌 ‘존엄의 축적’이 된다.


5.

두 사람의 탈출 방식은 달랐으나 본질은 하나였다. 신영복의 탈출이 좁은 독방을 사유의 광장으로 승화시키는 ‘정신적 비상’이었다면, 빠삐용의 탈출은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육체적 해방’이었다.


이들의 삶은 내 좌우명이기도 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니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되다는 말처럼, 그들은 감옥이라는 가혹한 환경이 강요하는 ‘죄수’라는 정체성에 포획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분투했다.



6.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은 반드시 담장 밖으로 나가는 ‘결과’에만 있지 않다. 어떤 환경에서도 나만의 ‘코코넛 자루’를 부지런히 엮어내는 치열한 기획의 시간 자체가 이미 무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코코넛 자루 하나에 의지해 망망대해로 몸을 던진 빠삐용의 포효 “이놈들아, 나 여기 살아 있다! (Hey you bastards, I'm still here!)”— 는 바로 그 주체적인 존엄을 증명하는 승전보이다. 끝까지 나만의 항해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그 서슬 퍼런 ‘인생 낭비 죄’로부터 비로소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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