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다림의 설렘과 애틋함을 거세당했다
“기다림이 번번이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산모롱이에 딴 사람만 나타나거나
아무도 안 나타날 적엔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복받쳤다.”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
1.
박완서의 소설 속 어린 ‘나’는 산모롱이에서 할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대개 오래지 않아 사탕이나 약과로 보상받았지만, 실패로 끝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 서러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서러운 시간이야말로 어린 박완서의 감수성을 키우고 타인을 향한 간절함을 배우게 한 정서적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서러운 기다림은 멸종된 유물과 같다. 우리는 실시간 위치 공유라는 정교한 감옥 안에서 서로를 감시할 뿐, 보이지 않는 산모롱이 너머를 상상하지 않는다. 디지털 문명 속에서 기다림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은, 역설적으로 타인이 내 삶에 들어오기까지의 ‘경이로운 공백’을 삭제해 버렸다. 우리는 기다림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기다림이 선사하던 설렘과 애틋함이라는 인간의 원형적 감각을 거세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2.
황지우 시인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닫히는 그 문 앞에서 가슴 아린 고통을 노래했다.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라, 내 존재의 중심을 상대에게 옮겨놓는 ‘사랑의 훈련’이었다.
그 훈련의 과정은 때로 시린 고독을 동반한다. 기형도 시인은 「엄마 걱정」에서 “해는 시든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 엄마 안 오시네”라고 읊조렸다. 어두운 방 안에 ‘찬밥’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에게 기다림은 공포이자 절망이었겠지만, 거꾸로 그 시간을 견뎌내며 아이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켠다. “어디야?”라는 짧은 문자가 황지우의 설렘과 기형도의 그 먹먹한 외로움을 가로챈다. 기다림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효율적인 정보 교환만이 남았다. 상대가 오기 전까지 혼자 남겨진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이제 타인을 기다리는 법이 아니라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법’만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3.
지난 시절 나훈아의 「찻집의 고독」에서 식어가는 찻잔 속에 어리던 슬픔이나, 펄시스터즈가 노래한 「커피 한 잔」 속의 초조함도 이제는 낯선 풍경이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라며 속을 태우던 그 1분의 무게는 오늘날 초고속 통신망이 제공하는 수십 기가바이트의 정보량보다 무거웠다. 정보는 소비되는 순간 휘발되지만, 기다림의 1분은 찻잔 속에 침전되어 우리 내면의 퇴적층을 만들기 때문이다.
디지털 문명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성취’라는 세례를 주었지만, 그 대가로 기다림 속에 존재하던 ‘사유의 빈터’를 빼앗아 갔다.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바라보며 고독을 씹던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타인을 맞이할 채비를 하던 정결한 예식(ritual)의 시간이었다.
4.
기다림이 사라진 사회는 조급하다. 기다림의 부재는 타인에 대한 인내심을 갉아먹고,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 모든 과정을 ‘실패’ 혹은 ‘무능’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우리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바흠처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유도, 어쩌면 기다림이라는 정지 상태를 견딜 근력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박완서가 산모롱이에서 느꼈던 그 복받치는 서러움은, 사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뜨거운 기호였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즉각적인 연결이 보장된 이 무균실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정작 누구를 진심으로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5.
아름다운 인생은 번번이 성취되는 속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며 식어가는 찻잔을 응시할 줄 아는 여유에서 나온다. 기다림은 시간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마음속에 호젓한 산모롱이 하나를 들여놓아 보자. 누군가 오지 않아도 좋다. 그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보는 그 서러운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 우리에겐 나를 비워 타인을 마중 나가는 그 텅 빈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 메마른 영혼에는 새콤달콤하면서도 끝맛은 아릿했던 싱아의 맛 같은 생기가 돌기 시작할 것이다. 서러움이 목구멍까지 복받쳤던 그 아이가 훗날 거장이 되었듯, 우리를 키우는 것은 성취의 속도가 아니라 기다림의 심도(深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