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늘봄'을 꿈꿀까?

by 까칠한 서생
“아, 행복한 나뭇가지들이여!
그대들의 잎새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봄날과 작별하는 일도 결코 없으리라.”
— 존 키츠,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


1.

에덴동산은 필시 영원한 봄의 공간이었으리라. 그곳 나무들에는 먹기 좋은 열매가 항상 맺혀 있었다지 않은가. 현실의 세상이 생성과 조락이 반복되는 순환의 영역이라면, 에덴은 ‘항상 피어 있고 항상 맺혀 있는’ 영원의 공간이었던 게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역시 기후가 온화한 곳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사철 봄기운 가득한 장소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낙원이란 특정 장소의 이름이라기보다, 계절의 변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항구적인 봄’의 상태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2.

영국의 시인 존 키츠(1795~1821)가 그리스 항아리 속 그림을 보며 감탄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나뭇잎은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고, 그 안의 봄은 영원히 작별을 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키츠가 그토록 찬미했던 ‘작별 없는 봄’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인류의 간절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만약 세상에 ‘늘봄’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인류가 꿈꿔온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다. ‘늘봄’을 한자로 옮긴 ‘상춘(常春)’은 청와대 상춘재(常春齋)에서 보듯 최상의 환대를 상징해 왔다. 소설가 전영택(1894~1968)의 호이기도 했던 이 이름은 오늘날 최상의 보육을 지향하는 ‘늘봄학교’로 부활했다. 아이들에게 늘 봄날 같은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의지겠지만, 사실 ‘늘봄’은 현실에 부재하기에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결핍의 이름이기도 하다.



3.

여기서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형식논리에 따르자면 ‘상춘’과 함께 ‘상하(常夏)’, ‘상추(常秋)’, ‘상동(常冬)’도 사전에 나란히 등재되어야 마땅할 법하다. 하지만 현실은 묘하게 비대칭적이다. ‘상춘’과 ‘상하’는 자리를 잡았으나 ‘상추’나 ‘상동’은 보이지 않는다. ‘상춘’이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이상’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상하’는 적도 근방의 나라들처럼 ‘늘 여름인 상태’를 뜻하는 현실의 언어다. 사람들은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같은 곳에 실재하는 여름(상하)은 굳이 ‘늘여름’이라 부르며 상찬하지 않으면서, 실재하지 않는 봄(상춘)만은 기어이 ‘늘봄’이라 명명하며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상동’은 극지방에 엄연히 실존함에도 단어로 구현되지 못했고, 풍요로운 가을 역시 ‘늘가을’이라는 특별대우에서 제외되었다.


4.

왜 유독 ‘봄’에만 ‘늘(常)’이라는 영원성이 허락되었을까. 이는 아름다운 시간의 소멸을 두려워하며, 오직 시작과 생동의 계절만이 박제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지독한 편애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소멸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는 심리적 반작용이 ‘늘봄’이라는 허구의 단어를 낳았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늘봄’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라, 결핍된 욕망이 투사된 가상의 기호임이 분명해진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장 순진하고도 간절한 욕망이 그 이름 속에 가만히 깃들어 있는 셈이다.


5.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는 봄을 두고 ‘영원한 기다림의 실현’이라 했다. 그 기다림 끝에 올해에도 기어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 아무리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라도 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는 못한다. 그러나 실현된 봄날은 결국 가고야 만다. 지지 않는 꽃과 시들지 않는 새순만 가득한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아닐 것이다. 겨울을 겪지 않고서 어찌 봄의 가치를 알 수 있겠는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주인공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외치지만, 사실 삶을 삶답게 만드는 힘은 ‘변하는 것들’에 있다. 백설희가 불렀던 동명의 노래 가사처럼, 꽃이 피면 함께 웃다가도 꽃이 지면 함께 울 수 있기에 봄도 삶도 아름다운 법이다.


6.

결국 진정한 ‘늘봄’의 경지는 지지 않는 꽃길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도 다시 올 봄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에 있다. 존 키츠가 감탄한 항아리 속 그림처럼 박제된 영원이 아니라 짧기에 찬란한 이 계절을 온전히 살아내는 태도, 그것이 우리가 꿈꿔야 할 진정한 ‘늘봄’이 아닐까.


봄날은 기어코 가고야 만다. 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이 아름다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짧아서 더 애틋한 그 기운을 맘껏 느껴보고 싶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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