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결국 갔군. 이렇게 졸지에 가게 될 줄 몰랐네.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게. 그런 경우를 두고 '업보'라고도 하고 '자업자득'이라고도 하지. 저 세상에서는 부디 차카게 살기 바라겠네. 이승에서 진 빚이 워낙 많아 다 갚으려면 저승에서는 장수할걸세.
듣자 하니 자네의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더군. 자네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역시 전 총리인데, 형제라면서 왜 성이 다르지?)가 자신의 조상이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라고 실토했다지. 그러니 자네 외가 쪽은 ‘한국계’ 일 가능성이 있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했는가? 하긴 '기시 노부스케'는 1급 전범으로 능지처참을 당해도 시원치 않은 군국주의 일본의 주역이었으니, 그 자가 만일 한국계라면 우리가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겠군. 그러니 그건 낭설이기를 비네.
자네 집안 얘기를 조금 더 해보겠네. 고조부인 ‘오시마 요시마사’는 동학농민혁명을 구실로 들어온 일본 군대의 지휘관으로, 민비 시해를 주도했고 고종을 겁박했으며 우금치에서의 동학농민군 학살을 지휘했다지. 그 자의 성이 아베가 아니라서 자네의 친고조부가 아니라 외고조부라는 썰도 있는데 그건 뭐 아무래도 좋아.
그리고 일본 패망 1년 전인 1944년 조선의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아베 노부유키'가 자네 증조부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가보더군. 그 자는 조선의 청년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써먹고, 남편과 아버지를 탄광 막장 같은 곳에서 죽음의 노동을 강요한 전쟁광이었다지. 전쟁물자로 놋그릇을 징발하고 쌀 한 톨까지 모두 긁어 가져 가고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어간 원흉이기도 했고. 그 자가 자네의 증조부가 아니라서 다행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그런 작자와 자네 간에 깊은 근친성을 느낄 정도로 둘에게서 비슷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두기 바라네.
'아베 노부유키'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지. 그 자가 패망 후 우리나라를 떠나며 했다는 말이 가관이더군.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은 문명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는 노예적 삶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 아베는 반드시 돌아온다.”라고 했다지? 이 말을 처음 듣고 섬뜩했네.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는 노예적 삶’이라는 대목에서 특히 소름이 돋더군. 그 자가 설계해놓은 장단에 맞춰 부화뇌동하는 토왜(土倭)들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지.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방명록에서 자네가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고 당당히 적었고, 이 문구를 보고 많은 우리 국민들이 경악했지. 그러니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는 노예적 삶'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결국 '아베 노부유키'의 구상이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네.
패전 직후 자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기사회생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네. 1급 전범인데도 다른 전범들이 처형당하기 전날, 미군정과 모종의 협상 끝에 갑자기 석방되어 나중에 총리를 지내기도 한 그 이야기 말일세. 그때부터 자네 집안은 미국과 뒷거래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법칙을 깨달아 오늘까지 미국의 비위를 잘 맞추고 있다고 하지. 미국의 따까리가 되는 것도 자네 집안의 가업인 셈이더군.
아 참, 자네가 조슈 번(현 야마구치 현) 출신이라는 사실을 빠뜨릴 뻔했군. 자네의 친부인 '아베 신타로'(전 외무대신), 앞서 말한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와 작은 외조부 '사토 에이사쿠', 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까지 모두 조슈 번 출신이었더군. 이게 다가 아니지. 메이지 유신의 중심인물이자 한반도 병탄의 주역들 대다수가 조슈 번과 샤쓰마 번 출신이었는데, 그중 조슈 번 출신으로는 병탄의 핵심 주역 '이토 히로부미', 민비 살해의 주범 '미우라 고로', 가쓰라-태프트 조약의 당사자 '가쓰라 다로', 한국통감부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조선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 등이 있지. 이 모든 인물의 배후에 이들의 스승이자 정한론(征韓論)의 기수 '요시다 쇼인'이 있었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네. 물론 자네 부친은 반전 평화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니 그 점은 참고하겠네.
이처럼 자네 집안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은 우리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우리를 괴롭혔어. 지긋지긋한 악연이었지. 자네는 그 잘난 혈연과 지연의 작용으로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즉 밈 meme)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그렇게 안달했던 거였어.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걸세. 자넨 위안부 옹호발언, 일본의 재무장화 시도, 한일 무역분쟁 야기 등으로 그 악연을 이어갔지 않았던가. 자네의 죽음으로 그 악연이 끝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가는 듯하네.
비명횡사한 사람에게 나쁜 얘기만 늘어놓아 섭섭해할 수도 있겠군. 그래서 마지막으로 덕담도 한 마디 해주겠네. 35년간 식민지를 경험했음에도 늘 우리의 롤모델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본이 알고 보면 하찮은 나라라는 걸 알려줘서 정말 고맙네. 일본이 밴댕이 속처럼 협량한 나라임을 알게 된 건 바로 자네 때문이었지. 덕분에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부문에 남아있던 한국인의 일본 컴플렉스는 거의 사라진 듯하이. 고맙네. 얼마나 고마운지 혹시 자네 몸속에 흐르는 한국계의 피가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자네는 우리 조상이 세워놓은 X맨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 적도 있다네.
비록 구차한 목숨이라도 목숨은 다 소중한 법이니, 느닷없는 죽음 앞에 명복은 빌어주겠네. 더이상 자네같이 불행한 인간이 없기를 빌며. 안녕, 아니 굿바이, 아니 사요나라 아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