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칠한 서생 Jul 19. 2022

<해변의 카프카>에는 해변도 카프카도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형식 실험

사람들이 하도 하루키 하루키 하기에 대충이라도 알고나 있어야겠다 싶어서, 그의 23년 작가 생활의 총결산이라는 <해변의 카프카>를 손에 들었다. 상하권 합해서 800쪽이 넘는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와 지루함, 몰입과 따분함이 교차되었다. 즉 흥미와 몰입을 유도할 만한 묘한 끌림과, 지루함과 따분함을 느낄 만큼 불유쾌한 감정이 공존했다. 불유쾌함을 느낀 이유가 작품의 문제인지 픽션을 좋아하지 않는 내 독서 취향 탓인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나는 <해변의 카프카>의 내용보다 형식을 읽어내려 애썼다. 내용보다 형식에 주목하는 독법은 나의 오랜 소설읽기 습성이다.  독법의 장점은, 우선 지루한 부분은 건너뛰며 대충 읽어도 된다는 점, 그리고 때로는 내용에서는 찾기 어려운 작품의 비밀을 형식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제목인 '해변의 카프카'부터가 아무런 내용이 없는 형식이다. 소설 속에는 해변에 대한 어떤 의미 있는 설명도 나오지 않고, 카프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체코 출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도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해변의 카프카'는 해변도 카프카도 없는 텅빈 기표일 뿐이다. 형식 위주의 독법을 통해 내가 파악한 이 소설의 특징은 세 가지였다.


연극 <해변의 카프카>의 한 장면


첫째는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공존'이다. 구체적으로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혼용, 심지어 '너'가 등장하는 2인칭 시점의 활용, 현실과 환상의 혼재, 과거와 현재의 뒤섞임,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의 호환 등 비동시적이어야 할 것들이 동시에 공존했다. 이를 위해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그리스 고전, 무슨무슨 가타리라는 이름의 일본 고전과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와 신사에서부터, 프로이트니 구조주의니 하는 근대 학문, 태평양전쟁 당시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거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재가 무엇을 위해 기능하는지는 아리송하다.


두 번째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운명 정론'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관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 것부터 그렇다. 또한 예컨대 "우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가는 것은, 세계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있기 때문이지. 우리들의 존재는 그 원리의 그림자놀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라는 진술 속에도 운명 정론적 관점이 담겨있다. 이는 소설 속에 가끔 등장하는 그리스 비극과 구조주의, 그리고  일본의 토속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매개항의 연쇄'이다. 매개항이란 한 범주 내의 두 대립항 사이에서 이들을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호학과 구조주의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이다. 주인공의 나이인 15세도 아이와 어른의 매개항이고 제목에 들어있는 '해변'도 바다와 육지의 매개항이고, 주인공에게 가장 친절했던 조력자의 젠더는 일종의 중성인데 이는 남성과 여성의 매개항이다. 이 매개항들은 전체 소설의 구조 속에서 매우 중요한 메타포로 기능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원관념(객관적 상관물)이 뭔지, 작품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운명 정론', '매개항의 연쇄'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흥미와 지루함, 몰입과 따분함을 거듭 반복하며 겨우 완독한,  불성실한 독자라서 그런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해변의 카프카> 하루키에 의한 다양한 형식 실험의 장이었고 내용은 이를 위한 장식물이었다는 점이다.


형식 실험을 통해 그는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판매? 명성의 확인? 예술적 성취? 현실에 대한 영향력 행사? 나로선 알 수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이 일본에서만 100만 부가 넘게 팔렸으며 세계 수십 나라에서 번역되어 그에 필적한 매출을 올렸다는 것과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끝-




작가의 이전글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