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성격을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근대인은 자아를 찾아서 늘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떠나야 하는 존재인데, 그 모험의 여정을 담는 형식이 바로 소설이라는 뜻이다. 임은정 검사의 의연한 다짐이 담긴 "계속 가보겠습니다"라는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루카치의 그 유명한 명제를 떠올렸다. 물론 임 검사의 그 다짐은 루카치의 그 명제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삶 전체를 건 모험의 여정을 담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검찰개혁이라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다.
<계속 가보겠습니다>는 '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특권 집단'인 검찰에 대한, 10년간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결의와 애정이 페이지마다 배어있는, 한 정의로운 검사의 외로운 투쟁기이다. 검찰이 문제가 많은 집단이란 사실을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무도하고 무자비한 조직인지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물론 검찰 전체가 아니라 일부 특수통 검사집단이 더 문제겠으나, 나머지 검찰 구성원들도 그 조폭적 행태를 침묵으로 방조한 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전에도 검찰의 치부를 폭로한 전직 검사가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몇몇 사건을 겪은 후 더러워서 그만둔 인물들로 기억한다. 물론 그들의 용기도 가상하다. 하지만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립무원의 호랑이굴에서 단기필마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퇴 압력과 인간적인 모멸감을 견디면서, 기수 열외 따위의 쪼잔한 따돌림과 좌천이니 수사 배제니 따위의 치졸한 불이익을 감수하며, 때론 작은 전공(戰功)도 세우고 더러 박수도 받아가며, 외롭지만 의연하게 버텨온 지사(志士) 형 내부 고발자는 임은정 검사가 유일한 것 같다.
2.
이 책의 1부에는 그동안 검찰 내부 게시판('이프로스')에 올린 글들이, 2부에는 경향신문에 실은 칼럼들이 들어있다. 각 꼭지마다, 글을 쓴 배경을 알려주거나 당시 검찰 내부 사정 및 사회의 분위기를 설명하거나 현재 시점에서 회고하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 책의 성격은 1부의 제목을 ‘난중일기’로, 2부의 제목을 ‘나는 고발한다’로 정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승전의 위업도 담겨있지만, 임은정 검사가 그 이름을 가져온 이유는 그보다 임란 당시 무능한 조정과의 갈등, 권력에만 눈이 먼 집권세력의 온갖 시기와 음해를 견디어낸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담은 기록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가령, 다음 문장들에서 임은정 검사의 결연함과 안타까움 같은 내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난중일기
“검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함에 있어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검찰의 부조리를 고치기 위해 저는, 힘겹게 용기를 내었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무죄는 무죄라고 해야 한다는 당연한 직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왜, 다른 사심이 있는지 의심받고 손가락질을 받았을까요? 이 놀라운 현실을 저는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2부의 제목인 ‘나는 고발한다'는 19세기가 저물 무렵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비겁한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함으로써 재심의 계기를 만든, 에밀 졸라의 역사적인 글의 제목(J'accuse)에서 따왔다. <로로르(L’Aurore)>라는 신문에 1898년 1월 13일 자에 실린 이 글은 에밀 졸라가 당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소 에밀 졸라의 문장과 달리 비장하고 엄중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것입니다.”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중에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실린 <로로르> 지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임은정은 에밀 졸라의 그 글처럼 자신의 글들도 검찰개혁의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하며, 국민들에게 검찰의 부당한 행태와 비리를 저지른 검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어떻게 보면 이 책 전체가 국민에게 드리는 고발장이다. 이는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에서 확인된다.
“공익 신고자인 검찰 구성원으로서 주권자 시민에게 검찰의 과거와 현재를 고발합니다. 이런 검찰이 과연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해주십시오.”
3.
임은정을 임은정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즉, 깨어지고 무너지면서도 지치지 않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이는 역사다. 역사 속에서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이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검찰개혁의 추진은 역사가 부여한 소명인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흔들릴 때마다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사례들을 살피며 확신을 얻었고, 정치검사들의 작태를 접할 때마다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의 <남명집南冥集>과 구한말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에서 전거를 구하며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또한 이육사나 윤동주의 삶과 시를 살피며 역사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지금 제가 혼자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길게 늘어선 줄의 앞자리에 가고 있는 겁니다 혼자라도 갈 각오입니다만 역사의 광야에서 앞서 걸어간 분들의 앞자리에 가고 있는 겁니다.”
“‘세상은 물시계와 같구나, 사람들의 눈물이 차올라 넘쳐야 초침 하나가 겨우 움직이는구나, 사회가 함께 울어줄 때 비로소 역사가 한 발을 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역사에 헛됨은 없습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벽이 부서질 때까지 저는 두드릴 것이고 결국 검찰은 바뀔 것입니다. 그 벽이 아니라 벽을 부수는 귀한 역할이 제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계속 두드려보겠습니다.”
그녀의 결연하고 비장한 자세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아직 임은정은 이순신이나 에밀 졸라와 비교될 수 없을지 모른다. 아직 남명 조식, 매천 황현, 이육사, 윤동주만큼의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가보겠습니다>에 실려있는 10년의 기록과 다짐이 머지않아 그들만큼의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리라 믿는다.
4.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근대사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법을 통해 봉건적 기득권 세력의 특권을 없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특권을 없애야 할 법이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이용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무리, 악법을 제정·유지하거나 개혁 법안을 저지하는 무리, 법의 해석을 독점해서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무리들이 손을 잡고 카르텔을 만들어 새로운 특권세력이 되고 있다. 특권은 엄청난 지대 수익을 통해 막대한 경제자본은 물론 강력한 문화자본과 사회자본까지 낳는다. 그렇게 특권으로 만들어진 자본은 대물림되면서 대를 이어 특권세력을 탄생시킨다. 250년 전 특권세력을 없앴던 법이 새로운 특권세력을 낳게 된 이 엄청난 반전! 움베르토 에코의 의문대로 지금은 과연 포스트모던(탈근대)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GDP 3만불 돌파와 선진국 진입, 연이은 아카데미상 수상, BTS의 빌보드차트 석권, '오징어게임'의 전세계적인 열광에 도취해 있는 사이, 법 기술자들은 굳건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더욱 미쳐 날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문명(=법치)으로 위장된 야만사회일 뿐이다. 이 새로운 야만사회에서는 돌도끼나 돌칼 대신 법봉이나 법전을 들고 짐승 가죽 대신 법복을 입은 신종 야만인들이, 노루나 사슴고기 대신 전관예우나 개발이익 따위의 기름진 음식을 배터지게 먹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