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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Jul 18. 2022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단상

*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북한강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둠을 머금은 물안개가 산허리를 낮게 두르다가 점점 사라져갔다. 나는 남이섬에 들어가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으며 강변을 거닐었다. 한번쯤 꼭 이렇게 하고 싶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품었던 소망을 비로소 이룬 것이다. 물론 노래처럼 새벽 강이 아니고 저녁 강이라 못내 아쉬웠지만.


북한강에서, 시원의 시공간을 발견하다


정태춘에게 시간과 공간은 늘 붙어 있다. 이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강물에 발을 담그면”과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라는 표현에서 확인된다. 강물은 시간과 함께 흐른다.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상류의 청정한 강물도 있고 때 묻지 않은 과거의 시간도 있다. 즉 그에게 한강의 상류로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와 과거를 향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는 일치한다. 그래서 한강의 상류인 북한강으로 간다는 것은, 자신이 꿈꾸는 시원(始原)의 시공간으로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벽’은 바로 그 시원의 시간이고 ‘북한강’은 바로 그 시원의 공간이다. 

      

새벽의 북한강은 밤새 머리를 짓누른 먹구름을 씻어주는 곳, 산과 산들이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신비한 소리를 들려주는 곳,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는 곳이다. 정태춘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시간과 공간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훼손된 공동체의 원형이 보존된 유토피아이기도 하고 자연과 인간이 순수하게 어우러진 에덴동산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과거로, 새벽으로, 강의 상류로, 즉 시원의 공간과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새롭다고 했다. 이는 자본주의적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자 저항이다. 자본주의는 단 1초라도 지나간 시간은 낡았다며 폐기처분하고, 현재는 늘 결핍되고 부족한 장소로 깎아내린다. 그 대신 미래에는 모든 게 더 새롭고 풍요로운 세상이 올 거라고, 그런 세상에 살려면 새로운 상품을 늘 소비해야 한다고, 그래야 행복할 거라고 유혹한다. “자본주의적 시간관은 항상 지금 여기가 아닌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지금은 하지 말라는, ‘가만히 있으라’는 시간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입니다.” 재야 철학자 김진영의 말이다.



정태춘과 베냐민, 과거에서 미래를 찾다


정태춘의 시간관은,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고 한 독일 출신의 미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역사관을 닮았다. 베냐민이 빼앗긴 전통을 미래의 시공간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듯이, 정태춘은 새벽 북한강이 거슬러 올라간 과거인 동시에, 우리가 꿈꾸어야 할 미래라고 노래한다.   


베냐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안에 간직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인간들과 오늘의 우리들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묵계가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때문에 과거는 우리에게 구원의 힘을 요청할 권리가 있고, 우리에게는 이 요청을 실현시킬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를 포착한다는 건 위기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일이다. 이는 지배 계급의 도구가 되어버린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빼앗아내는 일이다.”  


정태춘과 베냐민은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또한 많은 점에서 닮았다. 베냐민은 자신의 고향 베를린을 떠나 초창기 자본주의의 흔적을 찾아서 19세기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찾아갔지만, 정태춘은 자신의 고향 평택을 떠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음악 활동을 해보려고 한국 자본주의의 수도 서울을 찾아갔다. 베냐민의 파리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지만, 정태춘의 서울은 과거를 상실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서울은 여전히 낯선 이름이고, 천만 명의 욕망이 우글거리는 서울의 거리는 아직 텅 빈 곳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탈출을 꿈꾸었다. 


미래의 희망을, 베냐민은 파리의 과거 흔적에서 찾으려 했지만, 정태춘은 새벽의 북한강에서 찾으려 했다. 베냐민은 나치에 쫓겨 파리를 탈출해 미국으로 가려다 끝내 자살했지만, 정태춘은 새벽의 북한강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서울 종로로, 광주로, 정동진으로, 그리고 고향인 평택으로, 오랫동안 떠돌았다. 하지만 그런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이윤과 유용성과 욕망을 극대화하는 산업사회와 그 문명을 거부하고 과거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는다는 점에서, 정태춘과 베냐민은 수십 년의 시간을 두고 만난다.



진보적 낭만주의자, 정태춘


정태춘은 그렇게 새벽의 북한강, 곧 시원의 시공간에 잠시나마 정착했다. 〈떠나가는 배〉에서, 〈들 가운데서〉, 〈첫차를 기다리며〉,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며’, 아직 이르지 못한 이상향을 동경하기만 했던 초기의 다른 노래들에 비해 진전된 성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벽의 북한강은 어차피 상징의 시공간일 뿐이다. 현실의 시공간에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이 끼어있었다. 그는 그 뒤에도, 가령 〈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처럼 웬디스 햄버거 간판이 달린 서울 종로에서 장맛비를 맞고 서있어야 했고, 훨훨 날아오르는 비둘기에 또다시 희망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가 〈아치의 노래〉에서처럼 새장 주위로만 뱅뱅 돌 뿐인 자신의 처지를 자조(自嘲)하기도 했다. 절망과 희망의 끝없는 순환, 떠나고 돌아오고 기다리는 일의 무한반복, 이는 현실의 절망을 상징의 희망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는 아티스트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정태춘이 노래를 통해 광주 민주화운동이나 빈민 문제 등 매우 현실적인 발언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부정한 정치권력이나 현재의 경제적 모순을 지적하는 일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 혹은 자본주의가 낳은 산업문명 자체를 비판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1980년대 운동권 출신 노래운동가들 예컨대 안치환이나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엔 동력을 잃고 해체되었거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정태춘은 데뷔 초부터 꾸준히 문명 비판적인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 왔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라고 해서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나 좌파로 분류해서는 곤란하다. 그의 음악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에서도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과거에서 이상향을 찾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복고주의자나 낭만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주의자임이 분명하다. 좀 엉뚱한 표현이지만 그를 ‘복고적 진보주의자’나 ‘진보적 낭만주의자’라 부르면 어떨까 싶다.


(많은 사람들은) 산업주의와 시스템, 정치,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 작품들은 나와 세상과의 불화에서 나온 것이죠. 이 행성에서 이루어진 인간 문명의 정당성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중략) 과거 군부가 쥐고 있던 권력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시민에게 넘어온 게 아니라 시장 손에 들어가 버렸어요. 생산성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고, 누구 하나 그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죠.”(2019년 4월 21일자,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인용. 발언의 의도를 선명히 하기 위해 필자가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이처럼 그는 자본주의와 산업문명을 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부정의 현실적 동력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추구하고 싶은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지도 못했다. 물론 이는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와 투쟁, 혹은 학문의 영역이기에 아티스트인 그에게는 매우 힘겨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상징하는 ‘아치’는 날지 못하고 그의 노래는 “새장 주위로만 뱅뱅 돌” 뿐이다. 뜻을 같이하고 싶은 “졸린 승객들”은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말아서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희망을 미룰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무력감 탓에 10여 년간 창작활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강’은 과연 어디일까?


그가 동경한 시원의 시공간 ‘북한강’은 어디일까? 〈떠나가는 배〉에서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라고 묻고 “바람에 돛을 맡겨” 간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노래에서도 ‘시인의 마을’, ‘무욕의 땅’, ‘평화의 땅’, ‘저 하늘 끝 가보고 싶은 땅’과 같이 대개는 추상적인 장소로 표현했을 뿐이다. 다만 〈북한강에서〉에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손을 적시고 얼굴을 씻고 신비한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 그러면 안개가 걷힐 거라는 비유, 그리고 인터뷰의 발언 등을 통해 유추할 수는 있겠다.


그곳은 적어도 자본주의와 근대의 산업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마도 자본과 이윤의 논리가 없는 세상, 발전과 성장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 세상, 욕망과 결핍의 악순환이 사라진 세상일 테다. 그렇다면 그곳은 필시 사람과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우정과 환대가 넘치는 따뜻한 공동체일 것이다. 그곳은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후계동일 수도 있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오래된 미래』에서 소개한 라다크일 수도 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에 젖다가 나는 너무나 익숙한 도시 서울, 욕망으로 꽉 찬 그 거리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그리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절망과 희망이 기묘하게 뒤섞인 정태춘의 목소리와 기타 반주를 타고 흐르는 〈북한강에서〉는 발터 베냐민의 우울한 얼굴과 함께 오랫동안 귓가에 눈가에 맴돌았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갯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로는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가사 전문 


[도움받은 콘텐츠]

정태춘 작사/작곡/노래, 〈북한강에서〉, 1985년 발표

최재봉, <정태춘, “세상과의 불화에서…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 『한겨레』 (2019.4.21)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큐멘터리), 2022년 개봉

발터 벤야민(반성완 옮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1998)

김진영,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김진영의 벤야민 강의실』, 포스트카드(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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