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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Aug 23. 2022

기자정신에 밀려난 소설가정신

김훈 역사소설 <하얼빈>을 탈탈 털어보니

*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하얼빈으로 가는 길은 길고 멀었다. 김훈이 50년을 벼르고 벼리다가 작품 <하얼빈>이라고 하니 말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1909년 말 하얼빈 역에서 벌어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 사이는 당시 기차로 하루를 꼬박 가야 하는 거리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두만강 바로 건너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 영토이고, 하얼빈은 청나라 땅이긴 했으나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와 메이지 일본의 땅따먹기 게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만주의 한 복판에 있는 도시.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실천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갔고, 이토 역시 동양평화의 실천을 위해 산둥반도의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갔다. 두 명의 문제적 개인은 동양평화에 대한 전혀 다른 생각을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났다.


사건을 뼈대로 삼은 이 소설<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다음으로 김훈 역사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계보를 잇는다는 건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뜻일 터. 김훈의 역사소설은 모두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문제적 개인의 내면을 담담하고 냉정한 간결체에 실어 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이번에는 이순신이나 김상헌/최명길이 아니라 안중근이다.

 

2.

가상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역사소설은 팩션(fact+ fiction)일 수밖에 없다. 팩션이란 사실과 허구의 결합인데, 사실의 비중과 허구의 비중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김훈 역사소설의 경우, 전체적으로 허구보다 사실의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허구의 비중이 높은 다른 역사소설들, 가령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과 구별된다. 이 대목에서 소설가 김훈이 사실과 객관적 기록을 중시하는 기자 출신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장면을 담은 그림 엽서

   

역사소설이 사실과 허구의 조합이라고 했을 때, 사실과 허구의 비중을 가늠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의미 있는 허구적 인물의 설정 여부다. 거의 모든 인물이 허구인 <토지>나  <태백산맥>과는 반대로 김훈의 역사소설에는 허구적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컨대 <칼의 노래>의 경우 여진(女眞)이라는 여종이 등장해서 이순신 내면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남한산성>의 경우 날쇠라는 이름의 대장장이가 개입해서 사건의 전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날쇠는 완전히 허구적 인물이지만 여진은 최소한의 사실적 근거가 있기는 하나 허구적 요소가 매우 강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하얼빈>의 경우 이런 의미 있는 허구적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허구적 인물이 등장하기는커녕, 소설이 끝난 후에도 ‘후기·주석’이라는 이름의 장을 따로 두고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나 관련 사건 들의 배경담이나 후일담사료에 입각해 보충해주기까지 한다. 소설 본문에서도 지명이나 인명의 한자를 병기하거나 간혹 괄호 안에 해설을 써넣기도 한다. 이쯤 되면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정체성마저 흔들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할 정도다.  


이렇듯 <하얼빈>은 김훈 역사소설 중에서도 사실의 비중이 가장 높은 작품이다. 어쩌면 팩션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다큐드라마)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다큐드라마는 사실을 바탕으로 삼되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일부 요소에, 사실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허구적 요소를 끼워 넣음으로써 사실을 더 풍부하게 해주는 다큐멘터리의 한 종류. 그런 점에서 <하얼빈>은 다큐드라마의 정의에 비교적 잘 부합한다. 다만 영상이 없는, 또는 글로 쓴 다큐드라마라고 할까.   


3.

그런데 <하얼빈>을 포함한 김훈 역사소설의 매력은 허구적 서사가 아니라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없는 묘사에서 나온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훈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확인되지 않은 빈틈을 사실인지 허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그러나 다분히 사실일 것 같은, 아니 어쩌면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묘사로 메꾼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독특한 묘사 방식이다. 그의 묘사 방식 중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이항 대립의 팽팽한 긴장을 화자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하나로 합치면서, 그 대립 자체를 중재하거나 무효화한다는 점이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말들은 탄창 속으로 들어가서 발사되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가 총 밖으로 나와서 긴 대열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말은 총을 끌고 가려 했고, 총은 말을 뿌리치려 했는데, 안중근은 마음속에서 말과 총이 끌어안고 우는 환영을 보았다.”

-<하얼빈> 중에서-  


이토 저격 직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


이렇듯 말과 총은 안중근의 몸과 마음속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대립이 중재되고 무효화된다. 안중근에게 말은 곧 총이고 총은 곧 말이다. 즉 이토에게 총을 쏘는 행위는 이토와 전 세계인을 향해 법정에서 말로 이토의 만행을 응징하는 행위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항 대립을 받아안으며 무효화하는 방식의 묘사는 김훈의 소설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가령 <칼의 노래> 중 한 대목을 보자.     

     

“수(守)와 공(功)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시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의 노래> 중에서-      


이순신의 칼은 수세와 공세를 하나로 받아 안으며 하나로 합친다. 이순신에게 임진년의 전쟁은 이겨도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전장터에서 대승을 거두어도 조정의 임금과 대신들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자신의 목을 겨냥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은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 내면의 갈등과 번민을 이런 독특한 묘사를 통해 표현했다. 그런 묘사 방식이야말로 사실에 충실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만드는, 김훈 식 문체의 힘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얼빈>에서 사실의 전개에 중점을 둔 탓에 이런 독특한 문체가 대폭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4.

'로쟈'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평론가 이현우는 김훈의 소설을 '소설'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모질게 평가한 바 있다. 그의 독설을 들어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거나 ‘모노드라마’ 들이다. (...)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바 일상적 디테일, 저잣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수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중에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좋은 소설로 평가하는 나로서는 이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의 기준에 못미친다고 평할 순 있어도 아예 소설이 아니라고 평가절하하는 건, 학문적 엄밀성이 결여된 인상비평일 뿐이다. , 김훈 소설의 장르적 정체성에 대한 의심은 문체가 아니라 사실을 중시하는 기자정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수는 있겠다. 기자정신은 자료를 모으고 이야기를 구상하는 단계에서는 필요할 테지만, 정도를 넘어서 소설 내부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면 소설의 장르적 정체성을 흔들 수도 있는 탓이다. <하얼빈>에서 김훈 식 묘사가 대폭 줄어들고 그 자리가 사실들로 채워진 결과를 나는 그의 기자정신과 연결해서 이해하고 싶다.


이 책의 띠지에는 '<칼의 노래>를 넘어서는 김훈의 새로운 대표작'이라고 적혀있다. 아마도 <칼의 노래>보다 더 많이 팔리기 바라는 출판사 측의 속내가 그렇게 드러난 듯하다. 아무리 그래대표적인 문학 전문 출판사 작품간의 우열을 이렇게 대놓고 가리는 행위는 꽤나 성급하고 어색해보. "A가 B를 넘어선다." 표현은 광고문구에서나 어울릴 만큼, 그리고 계획적 진부화니 USP(고유한 장점)니 차별화 전략 따위의 마케팅 용어가 연상될 만큼 너무나 자본주의적이다. 광고문구에서  "가성비에서 아이폰13이 아이폰14를 넘어선다."라거나, "성능 면에서 아이패드가 갤럭시탭을 넘어선다." 하는 식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 않은가. 광고와 마케팅, 경쟁과 이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문학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다. 사람들이 문학을 찾는 이유가  그런 세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점을 출판사 측이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굳이 넘어섰는지 아닌지를 따질 필요가 있다면,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하얼빈>은 사실을 다루는 '기자 김훈'과 허구를 다루는 '소설가 김훈' 에서 '기자 김훈'이 전면에 나선 소설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기자정신이 소설가 정신을 밀어낸 작품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이거슨 김훈 소설의 진화일까 퇴화일까?  


허구와 시실, 사실과 묘사 간 배분을 따지는 게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김훈 역사소설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을 역사라는 거대 서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는 데 있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도 그는 갈등하고 번민하고 주저하기도 하는 개인일 뿐이다. 역사는 아니 우리의 근대는 그런 개인들이 만들어간 시간들이었음을, 김훈은 이번에도 잘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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