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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Aug 31. 2022

비혼과 비출산이 ‘밈’ 때문이라고?

-수전 블랙모어의 <밈>에서 건져낸 지혜

 

1.

얼마 전 외동아들에게 슬쩍 결혼 얘기를 꺼냈더니, 자신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비혼(非婚)이라는 단어를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아직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나는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뭐지, 이 멍하고 휑한 느낌은?     


2.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기계라고 했다. 유전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 즉 생존과 번식을 통해 자신의 전파와 확산에만 몰두하고, 인간은 그 유전자의 의도가 성사되도록 돕는 하수인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고 비혼자나 비출산(非出産) 및 무자녀 부부가 늘어나고 있는 걸까? 기존 진화학에 따라 인간이 유전자의 충직한 하수인이 되려면,  유전자라는 주인님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어 왕성한 생식 활동을 통해 마구마구 2세를 낳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대개 교육비/보육비 등 경제적 여건이나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인한 돌봄의 어려움이 그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사회학적인 해명이고,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등 기존의 진화학에서는 이에 대해 변변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눈치다. 인간이 ‘유전자의 폭정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해명이다.     


유전자의 폭정에 저항? 언제는 인간을 유전자의 하수인이라며 불쌍하고 비굴한 존재로 규정하더니, 이제 와서  폭정에 저항할 만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한껏 띄워주니 당황스럽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나 검투사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으나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해명으로서 왠지 궁색하다.

   

인간의 이타성 문제도 그렇다. 이 책에 따르면 기존 진화학에서는 인간의 이타성을 근연도(近緣度·Degree of relatedness: 두 사람의 혈연자가 한 개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확률), 상호적 이타성, 수렵채집 시대의 잔재, 유전자의 실수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도 유전자의 '폭정에 대한 저항'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궁색한 해명으로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45년 간 이국에서 빈민과 병자와 고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테레사 수녀의 헌신이 수렵채취 시대의 잔재였다는 말일까?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분신한 갓 스무 살 청년 전태일의 희생이 유전자의 실수였다는 말일까? 마땅한 논거가 없어서 해명이 어설퍼졌다는 의심이 든다.    

 

3.

비혼/출산 문제에 대해서든 이타성 문제에 대해서든, 그 이유가 '밈(meme)의 전파'라고 명쾌하게 답할 수 있다는 것이 <밈>의 저자 수전 블랙모어(Susan Blackmore)의 입장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겠다는 의도로 섹스하지 않는다. 섹스라는 행위, 그 즐거움, 그에 관한 마케팅을 원래의 번식 기능과 대체로 분리시켰다. (...) 섹스는 밈의 전파 수단이다.” 섹스와 번식기능을 동일하게 바라본 기존의 진화학과는 완전히 다른 놀라운 해석이다.        


밈이란 단어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진화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종의 화두를 던지는 의미로 할애한 하나의 장(11장)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복제자(제1의 복제자)인 유전자 말고도 문화를 창조하는 또 하나의 복제자가 있다는 일종을 가설을 세우고, 그 제2의 복제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던 데에서 유래한다. 밈 개념은 <이기적 유전자>가 발표된 1976년 이래 활발히 논의되지 못하다가, 심리학 기반의 과학 저술가 수전 블랙모어에 의해 1999년에야 비로소 <The Meme Machine>이라는 이름의 저서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는 2010년 <밈>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니왔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1941~  )

   

밈은 아직 학술적으로 정립된 개념이 아니고 ‘밈학’은 아직 미완성의 영역이라서, 그 정의도 다양하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라고 했고,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문화의 구성 요소로서, 가령 모방과 같은 비유전적 방법을 통해 전달된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나와 있으며, 수전 블랙모어의 <밈>에서는 ‘어떤 행동 수행에 관한 지침으로서, 뇌에 저장되어 있으며 모방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고 보다 정교하게 정의되어 있다. <밈>의 부제인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도 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밈에 관한 어떤 정의든 핵심은 ‘뇌에서 모방에 의해 전달된다’라는 점이며, 이는 제1의 복제자인 유전자가 ‘세포에서 생식에 의해 전달된다’라는 점에서 다르다. 디지털 미디어에서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짤’(또는 ‘짤방’)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블랙모어에 따르면 단어, 개념, 이야기, 정보, 지침, 기술, 습관, 행동, 놀이, 노래, 규칙 등 모방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요소는 모두 밈이다.   

  

4.

밈 이론은 기존의 진화학이 난감해하거나 머뭇거리는 많은 문제를 단칼에 처리해준다.  앞에서 비혼/비출산 및 이타성 문제를 언급했거니와,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과 확산의 이유도 밈의 관점에서 보면 명쾌하게 해명된다.


수직적 전달만 가능한 유전자와는 달리, 밈은 수평적/사선적 전달이 가능한 복제자다. 즉 유전자가 자식에게만 전달되는 복제자라면 밈은 자식은 물론 친구, 동료, 선후배 등 지인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복제자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부모나 조부모를 향해 상향식 전달도 가능하다. 전달 수단이 생식이 아니라 모방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유사 이래 밈은 책, 전화, 편지, 라디오, TV 등 다양한 아날로그 복제 도구들의 탄생 조건이 되어 왔으며,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의 대중화를 불러왔고 이를 통해 SNS 등 다양한 미디어의 폭증을 가능케 했다. 인터넷 미디어는 우수한 복제의 조건인 충실도, 다산성, 긴 수명을 훌륭하게 충족시키는 복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 미디어의 폭증은 밈의 수평적 전달을 확산시켜 수직적 전달을 능가하는 현상을 불러왔다고 블랙모어는 <밈>에서 설명한다. 그 결과 진화의 생물학적 이득을 약화시켜 결혼 및 출산 거부, 입양 등 결혼제도의 대변혁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블랙모어는 이 현상에 대해, "밈의 진화속도는 인간의 유전적 진화보다 훨씬 빠르다. 유전자는 밈을 따라잡지 못한다"라고 전제하면서, “성은 이미 밈에 장악되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5.

아들의 비혼 의사에 담긴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다. 아들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 했지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아비로서 아들의 밈보다 나의 지분도 1/2이 들어있는 그의 유전자를 응원한다. 그래서 그가 문화적 복제자인 밈을 전파하거나 공유하는 일보다 생물학적 복제자인 유전자를 전파하거나 공유하는 일에 더 몰두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아내가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와 관련된 밈들을 퍼뜨려서 아들이 이들을 모방할 수 있도록 선택압을 행사하는 일이다. 밈 이론으로 유추하건대, 그것이야말로 아들이 비혼 의사를 거두어들이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제1의 복제자인 유전자의 전파를 유도하기 위해 제2의 복제자인 밈을 전파해야 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블랙모어는 유전자와 밈의 경쟁에 주목하면서도, 유전자와 밈의 상호작용을 통한 공진화(co-evolution)강조다. 그러니 나의 방법은 분명 <밈>의 논지와도 잘 부합하리라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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