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기도 한 친일파 박정희는 왜 '민족중흥'이라는 기치를 들었을까? 민주주의를 외친 선량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전두환은 왜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까? '공정과 상식'이 심히 의심 받는 현 대통령은 왜 그것을 정치 입문의 명분으로 내세웠을까?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는 그 이유를 '리 신앙'에서 찾는다. 세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도덕 이념을 손에 넣기만 하면 권력과 부가 동시에 굴러 들어온다는 믿음이 바로 ‘리(理)’ 신앙이다. 이 책은 이처럼 조선조를 지배한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리와 기(氣)로 근대의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해부하는 책이다. 해부하는 칼날의 서슬이 너무 퍼래서 수시로 섬뜩섬뜩 놀라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대표적인 일본인 한국학자 오구라 기조(小倉 紀蔵) 교토대 교수다. 이는 세계 3대 일본인론으로 평가받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의 저자가 한국의 지성 이어령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출간 당시 일본인들에게 심히 불편한 책이었듯,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도 한국인들에게 심히 불편한 책이다. 이따금 과장과 비약이 느껴져서도 불편하지만 이렇게 절묘한 해석을 외국인이, 그것도 일본인이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도 불편하다. <축소지향~>은 일본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한국은~>은 일본에서 출간 후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한국에서 출간되어 소박한 화제를 모았을 뿐이다(1998년 일본에서 출간, 2017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 물론 두 책 간에는 내용의 깊이나 설득력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오구라 기조의 책이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8년간 한국에 살면서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한국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말할 자격이 있고, 우리는 그의 한국관을 들어볼 이유가 있다. 더구나 이기론(理氣論)이라는 한국적 사상체계를 통해 한국인의 인식구조를 밝혀내는 독창적인 방법론은, 한국 학자들의 허를 찔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작 한국의 학자들은 서구의 이론과 개념이나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준거로 삼아, 자신의 나라인 한국을 재단하는 논문을 쓰기에 바쁘지 않은가?
2.
이 책은 한국이 ‘도덕 지향적’인 국가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한국인은 비뚤어진 것에는 올곧은 것으로 맞서고, 올곧은 것을 상대할 때는 올곧음을 겨룬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올곧으면 상대방의 정신적 주인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상대방에게 동화되려고 한다.” 여기서 올곧음이란 도덕성을 말하고 그 도덕성이 바로 ‘리’이다. 그런데 특이한 건 도덕성의 최고 형태가 도덕과 권력과 부가 전부 구비된 상태라는 점이다. 이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다 모여 있는 탓에, 저자는 한국사회가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커다란 극장이라고 비유한다. 따라서 한국인은 타자를 빈번히 공격하고 타자의 공격에 매우 예민하게 대항한다. 공격도 단계적인데, 처음엔 기를 공격하고 그다음엔 리의 존재방식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 도덕 쟁탈전은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행태를 떠올려보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도덕쟁탈전의 전쟁터, 국회
양반과 사대부와 선비의 구분도 흥미롭다. 양반은 도덕과 권력과 부를 모두 소유한 자로서 신분이나 계급으로 고정된 특권층을, 사대부는 도덕과 권력을 소유한 자로서 관료이자 지식인을, 선비는 도덕만을 소유하고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여 이상을 추구하는 자를 각각 뜻한다고 저자는 규정한다. 물론 이러한 개념 규정이 실체적 정당성을 가지는지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현상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로서는 매우 유용해 보인다. 그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반독재 운동을 지식인과 학생들의 사대부 지향과 선비 지향이라는 두 측면의 산물이라고 해석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실현에도 성리학적 인식이 동원되었다는 해석이다.
리/기와 관련지어 ‘나’와 ‘님’과 ‘놈’을 해석하는 방식도 신선하다. 저자는 한국사회가 체현된 ‘리’의 많고 적음에 의해 구성원이 수직으로 서열화한 사회라는 전제 아래, ‘님’은 나보다도 기가 맑기 때문에 리를 많이 구현하고 있는 사람이고, ‘놈’은 ‘나’보다도 기가 탁하기 때문에 ‘리’를 적게 구현하고 있는 사람이며, ‘나’는 극기하여 기를 맑게 하면 ‘님’으로 상승할 수 있고, 반대로 극기하지 못하고 기가 탁하게 되면 ‘놈’으로 전락한다고 한다. 상승하든 전락하든 낙천적인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측면이다.
또한 저자는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종래에는 천시된 활동에 도덕성(=리)을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상공업 등 경제 종사자들이 도덕적 정당성과 정통성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이 시기에 도덕 지향성 사회가 부 지향성 사회와 권력지향성 사회로 이행했다는 사실을 짚어낸다. 저자는 아마도 이 대목에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처럼 한국의 산업화(=자본주의화)를 가능케 한 정신적 원동력을 찾고 싶었던 듯하나, 더 깊숙이 밀고 가지는 않는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어떤 도덕성, 정통성, 정당성을 주장하며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세력은 항상 그 구조상에서 동형이다.” 여기서 도덕성, 정통성, 정당성이 바로 리(=도덕성)이며, 한국의 역사는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든 그 리를 쟁취하려는 역동적인 역사라는 해석과도 연결된다. 저자가 한국이 하나의 철학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동경이자 위화감이라며 찬사도 비난도 아닌 표현으로 마무리한다.
3.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운을 맞춰 이 책을 평한다면 우선 '이 책은 하나의 도발이다'. 특히 서구의 이론 및 개념과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준거로 한국의 사회와 역사를 분석해온 학자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도발이다. 또한 '이 책은 하나의 질문이다'. 특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한국의 독자성을 강조해온 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 도발과 질문에 대해 어떤 대응이나 응답이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책과 관련해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성리학 혹은 이기론이라는 전근대적 가치가 근대 한국의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다. 박정희나 정주영으로 대표되는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도, 김대중이나 386세대로 상징되는 민주화 과정에서도 리의 이념이 작동되고 있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즉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형성한 이념은, 프랑스혁명 시의 자유나 평등의 정신이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의 자유방임주의라기보다, 성리학적 가치체계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책은 모든 한국인에게 하나의 도발이고 질문일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