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었던 두 유대인 사회학자가 있었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유로 독일에서 미국으로 옮겨온 어떤 연구소에 소속된 동료 사이였다. 20세기 초까지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무한히 성장하는 듯이 보였던 세계에서,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주의라는 흉폭한 정치 체제 아래 무자비한 전쟁과 학살이 벌어지던 때였다. 그들은 그 과정을 조국 독일에서는 직접 겪었고 망명지 미국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회학자의 사명감에 동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져,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지를 밝히려 했다. 현대(근대)적 야만의 뿌리를 파헤치려는 그들의 공동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드디어 1944년 5월 원고가 완성되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인 194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오랜 산고를 겪은 책이 출판되었다. 그 책이 바로 훗날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별칭을 얻은 <계몽의 변증법>이다. 그 두 사회학자는 바로 비판이론의 본산 프랑크푸르트대학교의 ‘사회연구소’를 대표하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어도어 아도르노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쓴 <계몽의 변증법>을 읽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이 책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에 따르면, 호머의 <오디세이아>를 읽지 않은 사람, 칸트의 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 독일 역사에 무지한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한다. 또한 그는 이 책이 체계적인 저서가 아니라 단상들의 모음이라는 점, 상당수 문장이 복문으로 얽히고 섥혀있다는 점, 문단과 문단 사이가 인과적인 논리 관계에 따라 배치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며, 보통의 독자가 섣불리 읽기 어렵다는 점도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원저와 동일한 제목에 ‘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해설서를 길잡이 삼아, <계몽의 변증법>에 접근해보기로 했다.
<계몽의 변증법> 독일어판
2.
계몽(啓蒙, Enlightenment)이란 신화의 어두운 세계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이성과 합리성의 빛으로 밝혀준다는 정신이었다. 종교, 주술, 마법의 신화적 사고와 결별하고 이성과 과학의 합리성으로 인류에게 진보와 행복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계몽의 정신이 특별히 부각된 것은 18세기 유럽에서였다. 당시 볼테르나 루소 등이 전파한 계몽의 정신을 특별히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계몽주의는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을 만큼 근대 세계를 연 핵심 사상이다.
우선 계몽의 세계는 신화의 세계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노 교수에 따르면, 신화의 세계가 교환과 측정이 불가능한 질(質)의 세계라면 계몽의 세계는 교환과 측정이 가능한 양(量)의 세계이다. 또한 계몽화는 혼란스러운 신화의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며, 계몽의 전개 과정은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또 계몽의 세계는 인간이 자연에 부속된 존재인 신화 세계와는 반대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를 확장해서 두 공저자는 “계몽이 자연에 대해 취하는 행태는 독재자가 인간들에 대해 취하는 행태와 같다”라면서 사물을 언제나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가 바로 계몽의 정신인데, 결국 계몽과 신화는 방향만 바뀌었을 뿐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노 교수는 해석한다.
계몽/계몽주의와 관련된 몇 가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 개념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먼저, 합리성/합리주의를 영어로 ‘rationality/rationalism’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은 비율이라는 뜻의 라틴어 ‘ratio’이다.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그 비율을 따지는 일, 즉 계산 가능성이나 측정 가능성이 합리성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尺]를 영어로 ‘rul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지배자'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질서를 영어로 ‘ord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명령’을 뜻하기도 한다. 질서를 부여하고 수치로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선 주체/지배자의 명령이 필요하다는 계몽의 원리가 그 단어들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3.
18,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도 계몽의 정신은 이성과 합리성과 과학을 통해 진보와 행복을 갖다주어야 옳은데, 인류는 왜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 체제와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야만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이것이 바로 저자들이 지닌 최초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원인을 계몽/계몽주의 그 자체에서 찾았다. 즉, 계몽/계몽주의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계몽의 원리 속에 야만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임을 꿰뚫어 보았다. 야만은 신화적 가치에 속하는 것으로, 그 핵심 원리는 가부장적인 억압과 지배이다. 따라서 계몽의 원리 속에 야만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억압과 지배가 야만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계몽의 원리라는 말이다. 저자들은 이를 “신화는 이미 계몽이다.”와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라는 두 가지 명제로 정리한다.
노명우 교수에 따르면, 그들은 “신화는 이미 계몽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신화와 이성/합리성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을 부정한다. 이는 탈신화화된 사유체계인 계몽 역시 신화와 얽혀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신화가 이성과 합리성이 등장하기 이전의 사유 방식이고, 이성과 합리성이 신화를 극복한 사유 방식이라는 근대적 해석 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또한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라는 명제를 통해, 계몽에 의한 진보가 실은 퇴행이라고 해석한다. 계몽은 자신이 신화의 비합리적 세계와 구별되는 합리적 세계를 구축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계몽이 진행되면 될수록 단계마다 더욱더 깊이 신화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것이 노 교수의 판단이다. 현대적 야만은 바로 신화의 모든 요소를 부수면 부술수록 계몽이 신화로 변절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4.
‘새마을 운동’ 노래 가사는 계몽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다.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 주도 농촌 계몽운동이었다. 1970년대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동네마다 새마을 운동 노래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노래의 1절과 2절 가사에는 계몽의 원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1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2절)
1절에서는 새벽종을 울리는 주체가 일찍 일어나 가꾸어야 할 대상들을 통제하는 상황이 펼쳐져있다. 주체가 객체를 지배/통제/억압하는 태도는 바로 계몽의 세계에 스며있는 원리다. 2절에서는 가난의 상징인 초가집과 좁고 제멋대로인 마을 길을 넓히고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혼란스러운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과 계산 가능성 및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작사가로 알려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과연 철저한 계몽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받은 제국주의 군사 교육이야말로 지배와 억압, 계산 가능성과 측정 가능성, 그리고 유용성의 가치를 추구했을 테니까.
5.
<계몽의 변증법>은 신화 속에 스며든 계몽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사일렌 에피소드를 인용한다.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일렌(혹은 세일렌) 신화를 형상화한 그림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오디세우스는 임무를 완수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도중에 수많은 자연의 위험과 만난다. 그중에는 사이렌 자매의 유혹이 있다. 사이렌 자매는 아름다운 노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하는 요정들이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미쳐 물속을 빠지고 만다. 그런데 오디세우스 일행이 고향에 가려면 그들 자매가 노래를 부르는 곳을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유혹에 빠지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키르케라는 마녀가, 뱃사공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아 노래를 못 듣게 하고 오디세우스 자신은 밧줄로 묶게 한 다음,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풀어주지 말도록 당부하라는 계략을 알려준다. 오디세우스는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오디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그곳을 지나 고향에 도착한다."
이 신화 에피소드에 대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렇게 해석한다. 오디세우스는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지니는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오디세우스와 뱃사공들은 신화를 무력화시켜 계몽화하는 합리적인 인물이다, 오디세우스가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의 지배계급이라면 뱃사공들은 피지배계급이다,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노를 젓는 뱃사공은 땀 흘려 노동하기 위해 쾌락을 억제하는 노동자와 같다.
이렇게 해서 신화와 계몽은 서로 뒤섞이며 신화의 핵심 원리인 억압과 지배가 계몽의 원리에도 고스란히 옮겨간다. 이를 통해 신화와 계몽의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지에 관한 처음의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6.
계몽의 원리는 자연과 노동력의 수탈을 통한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는 한편, 인류의 가장 큰 당면과제인 불평등과 기후변화도 낳았다. <계몽의 변증법>에 따라 추론한다면, 이는 계몽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성공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근대는 성공했지만 몇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근대는 성공하기 위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해야 옳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