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명절 때만 되면 ‘쇼핑의 자유’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어김없이 등장하는 광고가 있다. 바로 S사의 상품권 광고다. 전국의 수많은 자사 백화점과 대형 마트 어디에서나 그 상퓸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유라는 말을 당당하게 붙인 듯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자유에는 자사의 백화점과 마트에서 쇼핑할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특정 가격 범위 이내의 한정된 자유다. 즉 표시된 금액을 넘어서 쇼핑할 자유, 다른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쇼핑할 자유, 또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점표에서 쇼핑할 자유, 아니면 어디서든 쇼핑이라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을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쇼핑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자유, 예컨대 헌법에 나와 있는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할 상황이다. 이 광고를 보고 나서 S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복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껏해야 시장이 허용해야만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거기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내가 두 친구에게 각각 이 질문을 던졌더니, 한 친구는 광고가 다 그렇지 하면서 소비사회에서 만연한 언어 인플레를 당연시했고, 다른 친구는 그것도 그들의 자유라며 개념의 유연한 확장성을 정당화했다. 하기야 혁명으로 무너진 독재정권을 이끌던 정당의 이름은 ‘자유당’이었고, 대표적인 극우 반공단체의 이름은 ‘한국자유총연맹’이다. 검찰 공화국을 세워 ‘공안 통치’를 하리라 의심 받는 대통령은 연설할 때마다 자유라는 단어를 수십 번씩 외쳤다. 이처럼 자유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진영에서도 자유를 말하는 판국에, 적어도 일말의 진실은 담고 있는 ‘쇼핑의 자유’를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자유가 언제부터 그렇게 헤픈 단어가 되었을까?
프랑스의 시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폴 엘뤼아르는 '자유'라는 시에서,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구체적인 진실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라고 노래했다. 이 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한 저항 시인은 자유를 민주주의로 바꿔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쓴다고 읊조렸다. 이처럼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쓰는 일조차 목숨과도 바꿀 만큼 고귀하게 여긴 시절도 있었다.
자유는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 종교와 신분의 구속에서 벗어나 근대의 문을 연 열쇠 꾸러미에도 자유라는 황금열쇠는 단연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유라는 단어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단어도 드물다. 의미를 쉽게 알 것 같으면서도 때론 전혀 다른 두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애매하고 복잡하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부터 수많은 학자와 혁명가들이 주장해왔지만, 여전히 알기 어려운 단어가 바로 자유다.
자유를 주제로 하는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영화에서는 자유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문득 궁금했다. 넷플릭스를 뒤져서 <처음 만나는 자유>라는 이름의 영화를 용케 찾아내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로부터 ‘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2.
이 영화의 원제는 ‘Girl, Interrupted’로, 직역하면 ‘감금된 소녀’쯤 된다. 이를 ‘처음 만나는 자유’로 과감하게 옮긴 수입 영화사 측의 판단은 영리했다. 이 영화가 무엇보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묻는 영화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텍스트이건 정확한 이해를 위해 중요한 것은 곁가지에 빠지지 않고 핵심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스토리 라인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구속 대 자유’라는 이항 대립과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심층에 있는 의미는 표층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통해 드러난다.
정신병원이 주 무대인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세 명의 소녀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며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으로 수용된 수잔나(위노나 라이더 분), 마약 복용으로 이 병원에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는 리사(앤젤리나 졸리 분, 이 영화로 2000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그리고 아이 같은 모습의 순박한 데이지(브리트니 머피 분)가 그 소녀들이다.
세 인물은 모두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그들은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구속 요인인 정신병원에서 나가기를 원한다. 가장 먼저 병원을 나가는 사람은 데이지이다. 아버지의 배려로 퇴원한 다음 아버지의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생활하는 그녀를, 병원을 탈출한 수잔나와 리사가 찾아간다. 데이지는 리사에게서 “이게 삶이라 할 수 있니? 아버지 돈 받아서 인형이랑 장식품 사는 게? (...) 주변만 바꿨지, 네 처지는 그대로야.”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다음 날 아침 목을 매달아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다.
두 번째로 병원을 나가는 사람은 리사다. 정식 퇴원이 아니라 ‘탈출’의 형태다. (물론 리사는 그전에도 여러 번 탈출했다가 다시 붙잡혀 왔지만, 이 영화의 의미 구조상 두 번째라는 얘기다.) 하지만 리사는 탈출 후 마약과 헤로인을 복용하고 매춘까지 하다가 다시 잡혀 온다. 리사는 수잔나에게서 이런 뼈아픈 말을 듣는다. “넌 이미 죽었어. 네 심장은 얼어붙었어. 그래서 여기로 다시 돌아오는 거잖아. 넌 자유롭지 않아. 넌 이곳에서만 살아있다는 걸 느끼잖아.” 리사는 이 말을 듣고 오열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세 번째로 병원을 나가는 사람은 수잔나이다. 정식 퇴원의 형태이다. 그녀는 당장 나가서 일할 직장도 마련했고 장기적으로 글을 쓰겠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그녀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건강한 상태를 확인한 병원 측이 완치되었다는 판단을 내리며 흔쾌히 퇴원을 결정해준 것이다.
이 영화는 병원을 나간다고, 즉 리사나 데이지처럼 병원이라는 일차적이고 외형적인 구속 요건에서 풀려난다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대신 수잔나처럼 자신이 주도적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어야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두고 '처음 만나는 자유'라고 표현한 것이다.
일차적이고 외형적인 구속에서 풀려나 얻는 임시적인 자유를 소극적 자유, 다른 말로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라 부른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서 얻는 항구적인 자유를 적극적 자유, 다른 말로 ‘~를 위한 자유(freedom for~)’라고 부른다. 이 두 가지 개념을 통해 자유의 전정한 의미를 밝힌 책이 바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이다. 소극적 자유에 멈춰서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 아버지(데이지의 경우)나 마약 및 매춘(리사의 경우)처럼 - 또 다른 구속을 찾아 도피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3.
이 책의 주제는, 근대인은 개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개인을 속박하던 신분제 사회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이라는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켜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고, 히틀러의 나치는 바로 이 틈을 파고들어 그 개인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만든 체제였다고 보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마을 공동체와 교회 및 신분제와 같은 원초적 유대에서 벗어난 근대사회의 개인은 혼자이고 자유롭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러려면 자발적인 사랑이나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하거나 자신의 자유와 자의의 본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감과 무력감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인은 자발적 관계 맺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대신 새로운 구속의 주체에 복종하는 길을 택했다. 고독감과 무력감으로 불안해할 때 누군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준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는 강력한 경향이 생겨난다고 프롬은 보았다. 나치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독일 중산층이 주로 그런 경향을 보였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는 얻지 못한 상태, 이는 곧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데이지와 리사가 병원을 나온 직후 느꼈던 상태다. 에리히 프롬이 파악한 20세기 초의 근대 세계가 바로 데이지나 리사의 세계였다. 그래서 근대 사회체제는 개인을 발달시켰지만 개인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고, 자유를 증가시켰지만 새로운 종류의 의존을 낳았다. 이는 마치 데이지나 리사가 병원을 나가는 데는 성공해서 겉으로는 자유로워지는 데 성공했지만, 아버지나 마약/매춘에 의존하게 된 사정을 잘 설명해준다. 이는 착실히 심리상담과 치료를 받고 일기 쓰기로 내면을 정리하면서 자발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적극적 자유를 추구한 수잔나와 대비된다.
하지만 리사와 데이지는 자신들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바로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의 불균형 상태다. 중세의 교회 신분의 권위가 국가와 여론과 시장의 권위로 바뀌면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소극적 자유, 나아가 거짓 자유임을 모르는 근대인들에게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노골적인 형태의 낡은 권위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켰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권위의 먹이가 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 (...)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진정한 관계를 잃어버렸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도구화되었고,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프롬에 따르면 근대인은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고 자아를 상실함으로써 순응과 안정을 얻은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결국에는 전체주의의 거대한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는 마치 리사와 데이지가 외부의 개입(데이지에 대한 리사의 비판, 리사에 대한 수잔나의 조언)이 있기 전까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사이에 점점 커지던 불균형이 결국 자살과 참회를 계기로 파국을 맞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4.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내용만을 전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자유로우면서 외롭지 않은 상태,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는 상태, 독립적이지만 인류의 의미 있는 구성원이 되는 상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발성(또는 자발적 활동)이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자발성이야말로 인간의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대목은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사랑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은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 사랑은 창조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적극적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자발성,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 사랑을 통한 자아의 보존과 타인과의 결합, 이러한 관계 맺기를 통한 창조 행위... 다소 관념적이기는 해도 나는 이러한 키워드들을 음미하면서, 자유라는 이름에서 이전과는 달리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것은 ‘쇼핑의 자유’에서 연상되는바, 넘쳐나는 상품들과 화려한 디스플레이로 만나는 감정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수잔나가 병원을 나오면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겪은 동료들이나 직원들과 서로 포옹하고 격려하면서 생기는 감정일 것이다.
근대는 무엇으로보터의 자유는 주었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는 주지 않았다. 그 불균형을 틈타서 새로운 구속과 강제가 자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온갖 자유가 만발하고 있는 듯한 지금, 누구든 각자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과연 자발성과 사랑의 결과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