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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Sep 29. 2022

만들어진 소비자

소비는 언제부터 미덕이 되었나

*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라는 카피로 유명한 보일러 광고가 있다. 1990년대 초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광고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광고나 예능프로그램 같은 데서 가끔 패러디될 정도로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도시에 사는 아들 부부가 연탄이라는 재래식 난방 방식으로 불편하게 사는 농촌의 노부모를 떠올리며, 최신식 보일러를 설치해주겠다는 뜻을 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고 그 자체로도 성공했지만, 보일러 시장을 전국으로 확산해서 선점하려는 마케팅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광고로도 평가된다.      


이 광고에는 서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가지 유형의 소비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광고 전체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농촌의 노부모이고, 다른 하나는 며느리의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도시의 아들 부부다. 첫 번째 유형의 소비자는 노부부처럼 새로운 시장이나 새로운 제품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며, 오랫동안 전통적 생활 방식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현재의 재력과 관계없이 근검절약하며 낭비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그들도 최소한의 생필품은 구매해서 사용할 테니 소비자는 소비자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시장은 이런 유형의 소비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두 번째 유형의 소비자는 아들 부부처럼 새로운 시장이나 제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디어 등을 통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타인의 그것과 늘 견주어본다. 부를 과시하거나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더라도, 남들보다 조금은 더 앞서가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시장은 이런 유형의 소비자를 선호한다.    


 

 

농촌의 노부부와 도시의 아들 부부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소비자로서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를 보일까? 이 광고가 방영된 1990년대 초를 기준으로 노부부를 60대로 아들 부부를 30대로 보면, 노부부는 1930년대생이고 아들 부부는 1960년대생이 된다. 이렇게 가정하면 각각의 프로필을 어림잡을 수 있다. 노부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인이 되었고 1960년대 본격적인 근대화 이후에도 자본주의의 세례를 크게 받지 못하고 살아온 세대에 속한다. 그들의 정신적 뿌리는 농경사회 또는 전근대 사회에 있다. 아들 부부는 본격적인 근대화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고 고도성장의 수혜자로 청년기를 보내며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그들의 정신적 뿌리는 산업사회 또는 근대사회 있다. 


두 세대를 그렇게 갈라놓은 그 30여 년간은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또는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급속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서구의 약 200년 역사가 우리의 그 30여 년에 압축되어 있다. 그 기간에 노부부는 시장이 원하는 소비자가 되지 못했고, 아들 부부는 시장이 원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아들 부부는 근대적 주체로 생산되었던 반면, 노부부는 근대적 주체로 생산되지 못했다. 무엇이 그렇게 그들의 운명을 갈랐을까? 그 기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

전근대 사회 즉 농경사회가 근대사회 즉 산업사회로 옮겨가면서, 농민이었거나 수공업에 종사했던 일반 민중이 자동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근대사회에 최적화된 노동자나 소비자로 옮겨간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그들을 근대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 ‘누군가’는 자본이나 자본가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 체제나 근대 체제일 수도 있다. 사회학자 이진경은 이를 ‘근대적 주체의 생산’이라고 표현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를 보면, 공장 노동자인 주인공이 근대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바꿔 말하면 근대적 주체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다.


근대적 주체는 두 단계를 거치며 생산되었다. 첫 번째는 노동자로, 두 번째는 소비자로. 생산이 이끌어가던 자본주의 초창기인 19세기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순치된 근대인은 노동자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생산력이 높아지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된 제품을 사줄 소비자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노동자가 생산되었듯이 소비자도 생산되어야 했다. 그런데 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은 주로 국가가 맡았지만, 소비자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은 누가 맡을 것인가? 스튜어트 유엔(Stuart Ewen)은 광고가 바로 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유엔의 <광고와 대중 소비문화>는 1920년대 미국에서 소비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산업 교육에서 광고산업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음을 밝혀준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1920년대, 구체적으로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대공황이 일어난 1929년까지 10여 년은 사상 유례없는 풍요의 시대였다. 타이타닉 호와 같은 호화 유람선이 대서양을 오갔고, 바에서는 흥겨운 재즈의 선율이 늘 울려 퍼졌으며, 도시마다 포드사의 ‘모델 T’가 거리를 누볐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나오듯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순식간에 만들어진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뉴욕 중심가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마천루가 하늘을 찔렀다.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진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듯, 1차 대전 특수로 몰려든 엄청난 부로 인한 흥청망청한 기운이 미국 전역을 감쌌다. 그리고 1920년대 미국은 무엇보다 ‘대량생산-대량소비’로 상징되는 포드주의가 정착된 시기였다. 생산력이 높아감에 따라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는데 이를 선순환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에 부합하는 소비가 이루어져야 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3.

그런데 사람들이 전통적 유대, 공동체 의식, 자급자족 등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집하는 한 그 목표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기존의 가치를, 소비를 긍정하는 새로운 가치로 대체함으로써 소비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했다. 바로 이때 소비에 가치의 중심을 두는 사고 방식인 ‘소비주의(consumerism; '소비지상주의'라고도 함)’가 탄생했다. 1929년 발행된 <소비자의 판매>라는 소책자에는 소비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비주의라는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하였다. 소비주의는 오늘날 미국이 이 세상에 선사한 가장 위대한 사상이다. 소비주의의 핵심은 노동자와 대중을 단순히 노동자 또는 생산자로만 보지 않고 소비자로 간주한다.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팔고, 더욱 번영한다는 논리이다.”     


소비주의가 형성되는 데에는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 상승 그리고 할부판매와 신용카드와 같은 새로운 제도들도 기여했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것은 역시 광고였다. 당시 광고는 단지 상품만이 아니라 생활 방식까지 판매했다. 이를 위해 사회적 평판을 높이고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등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상적인 사회적 자아를 고양시키려 했다. 광고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방식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 광고대행사의 대표가 자사의 카피라이터에게 “일단 사람들에게 유아 사망률 수치를 보여주라”라고 지시한 내용을 들으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1920년대의 광고인들이 꿈꾼 미래는, 광고가 일상생활에 언어와 녹아들어 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이 지속적인 판매를 보장하며, 주어진 그대로의 일상에 대해 끊임없이 느끼는 불만을 광고에서 알려주는 대로 해소하게 되는 그런 세상이었다고 한다. 유엔은 1920년대에 소비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이었고 인생철학이었음을 지적하면서, 광고는 단지 무엇을 살 것인가라는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 무엇을 소망할 것인가라는 정신적 영역에서 대중을 교육시킴으로써 그 새로운 세계관이 자리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강조한다.  <광고와 대중 소비문화>의 원제는 ‘의식의 지배자(Captains of Conciousness)’이다. 당시 산업자본가들은 산업의 지배자로서 19세기식 생산 위주의 특성을 넘어 전체 사회를 차지하기를 원했으며, 이는 곧 ‘의식의 지배자’가 되기를 갈망했다는 의미였다고 유엔은 말한다     



4.

앞에서 소개한 보일러 광고로 다시 돌아가 보자. <광고와 소비 대중문화>의 기준으로 보면, 농촌에 사는 노부부는 19세기의 전통적인 소비 관념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래서 근검절약의 전통적인 가치를 고집하며 여간해서는 새로운 상품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열지 않는 짠돌이 소비자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아들 부부는 미국의 1920년대 소비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의 보일러 소비를 통해 불효자라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효심이 가득한 자식이라는 이상적인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로 충만한 소비자다. 아마도 그들은 광고라는 교육제도를 통해 소비 가치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것이다.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은 '19세기형' 소비자인 부모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로 무장한 '1920년형' 소비자인 아들 부부의 지갑을 열게 한 광고 전략은 주효했다. 아들 부부는 그것이 곧 자신들의 이상적인 자아상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의식이 암암리에 광고주로부터 지배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바꿔 말해서 그들의 효심은 광고주가 짠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한 결과라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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