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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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의 ‘50억 클럽 무죄 선고’를 계기로, 법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지고 있다. ‘50억 클럽 무죄선고’란 한 전직 검사가 막대한 개발이익을 챙긴 일당에게서 아들 퇴직금 등의 명목으로 50억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일을 말한다. 이 판결은 2010년의 ‘버스 기사 800원 유죄 선고’와 비교되면서 많은 국민의 공분을 샀다. ‘버스 기사 800원 유죄 선고’란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버스 기사에 대해 법원에서도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일을 말한다. 이렇듯 약자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강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혜택을 보는 일이 거듭될수록, 원망스럽게 떠오르는 용어가 바로 ‘법 앞의 평등’이다.
세계 최초로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한 법 조항은 1791년 9월 프랑스 ‘제헌의회’에서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6조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대한민국 헌법에도 당당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어쩌면 이 용어는 민주공화국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막중한 무게를 지닌다. 하지만 한 정치인은 이 용어를 “법은 (만인이 아니라)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유검무죄 무검유죄’라는 말도 결국에는 이 ‘법 앞의 평등’을 조롱하는 용어다. 언제부터 ‘법 앞의 평등’은 의문부호가 꼬리표처럼 달린 수상한 용어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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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법 앞의 평등’이라는 구절은 프랑스혁명 시 처음 등장할 때부터 기만의 언어였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당시 부르주아지가 처한 딜레마적인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사의 세계적인 권위자 알베르 소불의 대표작 『프랑스혁명사』와 『프랑스 대혁명』의 길 안내를 받으며, 혁명의 뜨거운 열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혁명은 한 마디로 상업과 무역 또는 법조계 등 전문직에 종사하며 부를 쌓은 부르주아가 제1, 2 신분 중 특히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유지 확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당시 부르주아는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에 이어 제3신분으로 ‘3부회’를 구성하는 평민의 상층부에 속했다. 인구 비율로 보면 특권층이 2~3퍼센트였고 나머지 97~8퍼센트가 평민이었다. 평민 계급은 부르주아 말고도 상퀼로트라 불리는 중간층과 민중으로 통칭되는 하층으로 구성되었다. 비율로는 부르주아와 상퀼리트는 극소수였고 민중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계몽사상과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부르주아지가 제3신분 전체를 대표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강화하는 일을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당시 부르주아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딜레마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우선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권을 지키려면 귀족의 특권을 없애야 했지만,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역풍을 맞아 자칫 왕정복고와 같은 반동적 상황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특권을 혁파하기 어려웠으므로 민중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그런데 그들은 민중의 동참을 이끌어낼 만한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혁명의 과실을 자신들만이 독점할 방도를 찾고 싶었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위로는 귀족 아래로는 민중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헌의회는 혁명의 명분으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자연법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 선언은 프랑스혁명의 핵심으로, 자유와 평등, 종교, 출판 결사의 자유 등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임을 선언하였다.”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듯 부르주아지는 이 선언으로 명분을 챙겼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특권층인 귀족의 반동을 무마하고 민중의 지분 요구를 피하기 위한 별도의 카드를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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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가 귀족을 무마하기 위해 내놓은 카드는 귀족과의 타협이었다. 제3신분 대표로서 부르주아 대다수는 법률가로서 영주의 권리를 개인의 정당한 소유권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강제로 폐지한다면 부르주아지 신분마저도 위험에 빠질 것으로 판단했다. 마침 구체적인 타협안이 자유주의자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자작 작위를 가진 한 귀족이 모든 봉건적 권리는 돈으로 변제되거나 ‘합당한 평가를 거쳐 매겨진 가격’으로 교환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이 제안에 대해, 정당한 보상 없이 영지를 소유한 귀족 영주들의 본원적 권리를 완전한 포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것이 특권 폐지의 실체였다. 그래서 특권계급은 그들의 재산을 전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빼앗기지 않았다고 한다. 소불은 19세기에 들어와 귀족은 결국 상층 부르주아지와 하나로 합쳐졌다며 부르주아와 귀족 간 타협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경제적 봉건제도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모든 봉건제적 권리가 변제될 수 있음이 선언된 것이다. 이는 귀족들이 누리던 권리의 대부분이 실질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을 뜻했다. 농민들은 예속에서 벗어났으나 그들이 농사짓던 땅을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즉 되사기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농들이 되사기를 통해 토지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
다음으로, 부르주아가 민중의 지분 요구를 피하려고 찾아낸 방안은, 인권선언 중 몇 개 조항에 딸린 제약조건이었다.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한 제6조를 다시 살펴보자.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여기서 ‘~이외에는’이 바로 제약조건이다. 부르주아 계급 특유의 근엄하고 정중한 말투로 표현해서 그렇지 실은 능력과 덕성과 재능이 부족한 민중 계급 앞에 드높은 장벽을 쳐놓은 것이다.
제약조건이 제6조에만 있지는 않았다. 제1조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나며 또 그렇게 존속한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동의 유용성에 입각할 때만 가능하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오직 공동의 유용성에 입각할 때만~’이 제약조건이다. ‘공동의 유용성’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못 미치면 사회적 차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연 듯이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 세상이 ‘공동의 유용성’ 여부를 가늠하는 ‘해석 권력’의 맡겨진 셈이다.
또한 13조는 “그것(공동의 기여)은 모든 시민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이다. 여기서는 ‘능력에 따라~’가 제약조건이다. 기여의 평등한 배분이 절대적으로 보장된 듯이 보이지만 실은 능력의 정도를 판단하는 ‘해석 권력’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던 미라보 백작조차 “이러한 주의‧제약‧조건들은 거의 도처에서 권리를 의무로, 자유를 속박으로 대체하고 여러 측면에서 입법의 가장 거추장스러운 부분까지 잠식하여 인간을 자연 상태의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속박된 존재로 만들었다”라며 비판했다. 바로 그 제약조건들 때문에 ‘법 앞의 평등’은 물론 ‘자유와 평등의 천부인권’과 ‘기여의 평등한 배분’이 모두 기만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불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1789년에 부르주아가 권리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것은 단지 특권계급의 특권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민중에 대해서 부르주아는 법이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인 평등만을 문제시할 뿐이었다.”
프랑스혁명사의 세계적인 권위자, 알베르 소불
부르주아는 혁명력 3년(1795년)에 채택한 헌법에서 또 하나의 특권 세력이 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헌법에서 부르주아지는 인권선언 1조를 폐지하고 모든 유색인은 시민권을 갖지 못한다고 결정했으며, 노동자들의 결사와 파업을 금지했고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만 투표권 부여했다. 이에 대해 소불은 “출산에 의한 특권을 금전에 의한 특권으로 바꾼 셈”이라며, “새로운 국가는 단지 새로운 지배계급의 특권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에 불과했다”라고 평가했다.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가 특권을 없애서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모든 인간에게 고루 나눠주려고 일으킨 혁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특권의 주인이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바뀐 사건이었다. 그러니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법은 만인에게만 평등하다’ 라거나 ‘무전유죄/유전무죄’ 또는 ‘무검유죄/유검무죄’라고 해석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