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히든 아이덴티티>라는 영화가 있다. 1899년 영국의 스톤허스트라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영화다. 이 영화를 훨씬 더 흥미롭고 풍부하게 감상하려면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는 게 좋다. <광기의 역사>는 광기 즉 미쳤다는 것의 기준과 그 대처방식이 시대마다 달랐음을 밝힘으로써 계몽주의가 신줏단지처럼 받들어모시는 합리주의와 이성이 실은 얼마나 부실하고 허접한 가치인지를 폭로하는 책이다.
하지만 분량이 1쳔쪽 가까운 데다 문체까지 현란하기로 소문난 이 책을 읽기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서 재야 철학자 허경 선생이 쓴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읽기>라는 우회로를 따라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사회의 다수 또는 지배자들은 세계에 대한 배타적 해석권력을 움켜쥐고 자기와 다른 자들을 심판하는 자의 위치에선다."
'배타적 해석권력'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온다. 객관적으로다가 누구나 승복하는 진실이나 진리는 없다. 진실이나 진리는 배타적 해석권력을 가진 자의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현재 정치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당당히 우길 수 있는 이유도, 뚜렷한 혐의점도 없는 제1야당 대표를 구속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도 자신들이 배타적 해석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는 진실을 실현하기 위한 노오력이 아니라, 알고 보면 해석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현 야당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민주당 최고위원들 발언을 들어보면, 내 귀에는 하나같이 "대명천지에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천벌을 받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문제는 그런 식의 항변은 민주공화국 정치지도자의 언어가 아니라 왕조시대 백성의 언어라는 점이다. 그 프레임을 깨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는 정치인은 보이지 않는다. 때론 어설퍼보이는 대로 풍자와 아재개그로 뒤통수를 치는 정청래가 그나마 눈에 띈다.
현재 해석권력을 소유한 세력은 검사와 판사와 언론, 그리고 이들에게 뒷돈을 대는 재벌(자본)이다. 그들의 충직한 푸들로 살아가는 집단이 여당 정치인 전부와 일부 야당 정치인이다. 군사독재시절 가장 강력한 해석권력이었던 집단이 교수와 문인 그리고 종교인이었는데, 지금 대다수 교수는 오래전에 자본 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문인과 종교인은 극히 일부를 빼고는 존재감이 미미하다. 안타깝게도, 현 집권세력에게서 해석권력을 빼앗아오는 길이 제도적으로는 없어 보인다. 촛불밖에 생각 나는 게 없다.
많은 사람이 3.1, 4.19, 5.18 그리고 6월 항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지만, 내가 보기엔 서글픈 역사다. 엄청난 희생을 치러 가며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수행한 다음엔 그 성과 위에서 다음 역사를 이어가면 좋은데, 이전 성과는 온데간데없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해결될 장벽이 도돌이표처럼 언제나 다시 또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게 나라냐를 묻기에 앞서, 이게 민주주의냐고, 한국인이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인류가 지난 2백여 년간 피를 흘리면 쟁취한 제도인 바로 그 민주주의냐고 묻는 게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