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가 서사를 압도한 소설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질펀하게 차려진 시골 밥상을 배부르게 해치우고 난 기분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은 느낌이 그랬다. 빨치산 출신의 부모를 둔 작가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사흘간 겪는 사랑과 미움, 연민과 원망의 복합적인 감정을 맛깔스러운 묘사로 버무려 한상 가득 차려놓은 작품이 바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사회주의자라면 농민 자식, 노동자 자식을 자랑삼아야 되는 것 아닌가. 박사라고 좋아하기는. 이러니 사회주의가 망했지. 뭐 그런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기개가 조금도 꺾이지 않은 혁명가처럼 지리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는 아버지를 내심 비아냥거렸다.”
이 소설은 사회주의, 민중, 혁명 따위의 맥락 없는 명분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아버지를 이렇듯 조롱하면서도, 그 명분의 허울을 벗겨내면 아버지가 평생 추구한 것이 결국 따뜻한 인간애였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조롱과 존경이 기묘하게 버무려지는 가운데 골계와 숭고 사이에 어색한 긴장이 흐른다. 작가가 공들여 벼려낸 단어와 문장들은 그 긴장의 줄을 타고 읽는 사람의 눈길을 내내 빨아들인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건 골계와 숭고의 이중주, 그 절묘한 엇박자의 화음을 귀 기울여 듣는 일이기도 하다.
제목에 ‘해방’이라는 말이 들어있는 걸 보고, 이는 응당 빨치산이었던 그 아버지가 꿈꾸었을 ‘민중해방’이나 ‘노동자 해방’을 뜻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버지의 시신을 보니 살아있을 때 그 어느 순간보다 편안한 표정이었음을 알고는, 이는 아마도 삶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럴 거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 해방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즉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표현으로 뭔가 거창한 역사적 의미를 내세우는 듯하면서도 실은 아버지가 육신의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날들 즉 장례식을 치르는 사흘간의 기록이라는 소박한 의미를 전하려 했다. 말하자면 이 제목에도 아버지를 대하는 복합적 감정이 담겨있다. 역사적인 거대담론과 인간적인 소박한 행사 간의 다분히 의도적인 엇박자, 그 의미상의 격차로 인한 어색한 긴장이 이 제목에서도 감지된다는 얘기다.
작가는 결국 아버지와 화해한다. 이 화해는 서사를 통한 구조적 갈등과 대결을 피해 화려한 묘사를 선택한 작가가 갈 수밖에 없는 예정된 경로다.
“...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수의에 싸이고 있는 저 시신과 내가 적어도 한때는 한 몸이나 같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 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나게 풍부한 묘사에 비해 서사는 대단히 소략하다는 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씌었다는 점, 서사가 향하는 갈등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여러 가지 작은 갈등으로 분산되고 있다는 점, 아버지의 죽음부터 유골처리까지의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시간 구성을 서사의 골격으로 삼았다는 점, 강력한 갈등이 없는 대신 실감 나는 전라도 사투리와 톡톡 튀는 문체가 몰입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작품은 하나의 완결된 소설이라기보다 잘된 수필이나 생생한 다큐라는 느낌도 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 마디로 묘사가 서사를 압도한 소설이다. 따라서 게오르그 루카치 식의 정통 리얼리즘 관점에서 보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럽다. 그렇다고 정지아 작가가 섭섭해하거나 위축될 건 없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상징하는 고난도 기술인 트리플 액셀을 보여주지 않아 감점을 받았어도, 다른 기술들에서 얻은 점수를 모아 세계 최고가 되지 않았던가. 다만 어떤 사람은 세계 최고든 뭐든 트리플 액셀을 구사하지 않고서는 피겨스케이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트리플 액셀이든 뭐든 세계 최고가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