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는 글'로 수록되었습니다.
1.
고개를 넘으니 ‘근대’였다. 시공을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탔다면 모를까, 어떤 공간을 지나자 특정한 시간이 나타났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1966년 초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올린 직후, 우리 가족은 아직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강원도 평창군의 어느 농촌 마을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근대화가 이미 시작된 강릉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평창은 전근대 농촌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강릉은 도심지를 중심으로 근대적 풍모를 제법 갖춘 도시였다. 평창과 강릉은 공간상으로는 물론 시간상으로도 그렇게 떨어져 있었다. 요즘이야 한 시간도 안 걸리지만, 당시에는 아흔아홉 구비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심하게 비탈진 비포장도로를 따라 서너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전근대에 살던 나는 불과 서너 시간 만에 근대로 진입했던 셈이다. 그러니 전근대에서 고개를 넘으니 근대였다는 표현이 그리 심한 과장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하루 종일 보이는 건 산이나 논밭뿐이며,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데다 보이는 자동차라고는 며칠에 한 번 지나가는 군용 트럭이 전부인 마을이었다. 어두워지면 호롱불을 켜고, 잡곡밥에 무가 들어간 된장국과 김치로 저녁을 먹고, 겨울이면 화롯가에서 불장난을 하다가야단을 맞고는 일찍 잠자리에 든 기억이 아련하다. 문화적 혜택이라고는 일 년에 서너 번 들어오는 전국 순회 영화 상영회에서 본 반공영화가 고작이었다.
전근대 농경사회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일곱 살 꼬맹이에게 근대화된 도시 강릉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시원하게 뚫린 4차선 아스팔트 길에는 버스며 택시며 트럭 등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수시로 지나다녔다. 중심가에는 ‘무려’ 3층이나 되는 건물이 눈을 가로막았고 밤에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눈을 사로잡았다. 시내에 세 개나 있는 극장에는 신성일이나 김지미 등 유명 배우가 나오는 영화 간판이 늘 걸려있었다. 이전에 살던 마을보다도 더 큰 시장에서는 별의별 물건들로 실컷 눈요기할 수도 있었다. 전근대를 살던 나에게 근대는 그렇게 순식간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놀라움과 호기심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중에야 근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거기는 과연 어떤 세상일까? 일곱 살의 어린 꼬맹이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2.
근대는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환멸이었다. 가령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며 근대를 연 계몽의 정신을 옹호했다. 하지만 보수주의의 원조라 불리는 리처드 버크(1729~1797)는 “프랑스혁명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 가운데 가장 경악스러운 것이며, 온갖 종류의 죄악과 어리석은 짓이 뒤범벅이 된 쓰레기 잡탕들의 광기다.”라며 근대를 연 프랑스혁명을 맹비난했다.
재빨리 서양의 근대를 흉내 낸 이웃 나라의 먹잇감이 된 20세기 초 한반도에도 근대의 파도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은 그 파도를 한편에서는 꿈과 기대를 품고, 다른 한편에서는 두려움과 열등감을 안고 바라보았다. 1919년 12월 발행된 <서울>이라는 잡지에 실린 '아등(我等)의 서광(曙光)'이라는 글에서 “극락세계가 이상적이 아니라 현재에 찾아왔으며 황금시대가 몽환적이 아니라 사실로 나타났도다”라며 말한 걸 보면 근대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29년 9월호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실린 '종로 네거리'라는 글의 한 대목을 보면 근대에 대한 두려움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편전쟁의 대포 소리로 중국의 만리장성을 부수고, 에도 만(灣)의 흑선(黑船)으로 일본 사무라이의 칼을 분지르고 상투를 자르고, 그 세력은 역시 조선의 강화도에도 와서 은은한 소리를 내기에 이 무슨 소리이냐 물으니, 태서(泰西) 제국의 봉건주의를 때려 부순 자본주의 상업의 소리라 한다.”
1930년대 경성 거리
역사의 진실은 희망과 환멸 사이 아니면 기대와 두려움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다. 원래 나는 발전 사관을 믿는 편이라 희망과 기대를 안고 역사를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곧바로 가든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가든 역사가 발전한다는 관점에 서서, 나중에 벌어진 역사적 현상은 이전보다 더 나아진 현상으로 보려 했다. 그래서 기후변화, 불평등, 능력주의, 극단적인 자유주의, 공동체의 파괴 등 크고 작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인류의 삶이 이전보다 나아진 상태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앞에서 나열한 그 문제들은 찬란한 빛 뒤로 어쩔 수 없이 드리우는 그늘 정도로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이 오랜 고정관념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런 변화에 영향을 미친 책 가운데 하나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다. 그는 이 책에서 1만 년 전 일어난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 사기 사건’이라고 모질게 평가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농업혁명이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는 점,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나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는 점 등을, 농업혁명이 최대 사기였음을 주장하는 논거로 제시했다.
내가 보기에 하라리가 농업혁명을 사기죄로 기소하며 열거한 죄목보다 근대의 죄목은 두 배 이상 많다. 그렇다면 먼 훗날 근대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해졌다. 하라리와 같이 까칠한 역사학자가 나타나, 앞에서 열거한 문제들을 들어 근대가 농업혁명보다 더 큰 사기 사건이었다고 비난하지는 않을까? 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런 의문을 안고, 그동안 대충 알고 있었던 근대를 시작부터 다시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3.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가장 난감한 문제가 ‘현대’와의 관계 설정이다. 사람들은 대개 근대를, 고대와 중세 다음에 오며 현대 이전에 존재하는 역사적 시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시대 구분 방식일 뿐, 세계 보편적인 사용법은 아닌 듯하다. 근대와 현대는 모두 영어로 ‘modern period’ 또는 'modernity'이다. 이는 곧 영어권이나 서양에서는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modern period’나 'modernity'를 어떤 사람은 근대라고 옮기고 어떤 사람은 현대라고 옮기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서양에는 근대 이후의 세계를 ‘post-modern period’나 'post-modernity', 우리말로 ‘탈근대’ 또는 '근대 이후'라고 할 뿐, 현대에 해당하는 용어가 따로 있지 않다. 결국 근대와 현대는 가치론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갖는 동일한 개념이다.
근대와 현대가 결국 같은 개념임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1966년 ‘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으로 ‘근대(화)’의 상징이 된 인물이 박정희이고, 그가 올린 기치 아래 산업계에서 박정희의 근대화를 실천한 인물이 ‘현대’의 상징 정주영이다. 그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렸다. '박정희 표 근대'의 성과가 결국에는 현대중공업의 유조선이나 현대자동차의 포니 등 '정주영 표 현대' 제품들로 나타났다. 근대가 곧 현대였고 현대가 곧 근대였던 것이다. 근대와 현대의 구분은 이렇듯 무의미하다. 역사학계에도 이들의 구분에 관한 확립된 정의는 없는 듯하다.
'현대'의 상징 정주영과 '근대'의 상징 박정희
나는 근대를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형성되어 그 이후 인류의 삶에영향을 미친 제도와 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려 한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모두 18세기에 태어나 현재에도 굳건하게 자리 잡은 제도이자 정신이다. 계몽주의, 법치, 공리주의, 제국주의, 국가주의, 식민주의, 소비주의, 공동체주의, 공화주의 등도 18세기 이후 현재까지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쳐온 제도와 정신 들이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 4차 산업혁명, 가상현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은 현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지만 실은 근대에 만들어진 만든 제도와 정신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므로 탈근대에 속한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4.
놀라움과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근대를 맞았던 그 일곱 살 꼬맹이는 스무 살이 될 즈음 대한민국 근대의 중심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리는 동안 근대가 고속 성장의 꽃을 피우고 풍요의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신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근대가 제공한 제도 속에서 이런저런 혜택도 보았고 갖은 풍파도 겪었다. 길어진 가방끈만큼 글줄도 읽었다. 그만큼 세상 보는 눈이 제법 넓어졌을 텐데도, 근대는 여전히 가늠하기 어려운 곳이다.
세상은 20여 년 전에 이미 거대 서사의 붕괴니 주체의 죽음이니 이종교배니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들로 한차례 들썩거렸고, 얼마 전부터는 빅데이터니 인공지능이니 사물인터넷이니 가상현실이니 하며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의제들로 떠들썩하다. 겉으로만 보면 세상은 그렇게 '포스트모던' 즉 '탈근대' 또는 '근대 이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넘는 이 시점에도 세상은 여전히 근대의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는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등의 정의관은 죄다 근대 형성기에 만들어진 개념과 사상들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불거진 쟁점도 정의니 공정이니 민주니 자유니 법치니 하는 근대적 개념들 주변을 맴돌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압축적인 근대화를 겪는 과정에서 전근대적(pre-modern) 제도와 의식까지 여전히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는 근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근대를 넘어설 수 없음을 말해준다.
5.
여기 올린 글들은 지난 몇 년간 기존의 통념을 뒤틀어보고, 상식을 거꾸로 보고, 고정관념을 뒤집어보며 근대의 참모습을 찾아 떠난 여행의 기록이다. 주로 책을 그 여행의 가이드로 삼았으나 때로는 영화, 드라마, 광고, 대중가요, 코미디 프로그램과 동행하기도 했다.
연어가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까닭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다. 즉 연어에게 거슬러 오르는 행위는과거로의 퇴행이 아니라 미래로의 진격인 셈이다. 나는 연어의 심정으로 근대로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가수 ‘강산에’가 부른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에 나오듯,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거슬러 오르려는 이유는 거기에 근대를 넘어설 미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