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정 보완되어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1.
2012년 4월 26일, ‘월가 점거운동’에 참여한 30여 명의 활동가들이 뉴욕 연방 홀(Federal Hall) 앞에 모였다. 연방 홀은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다. 미국 금융 자본의 부패와 탐욕에 대한 항의 시위인 월가 점거운동(Occupy Wall Street)은 2011년 11월 표면상 끝났지만, 그들은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거기서 이 운동의 지도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즉석연설을 했다. 그가 쓴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에 그 연설 내용이 나와 있다. 그 가운데 다음 두 대목이 내 눈길을 확 잡아당겼다.
“독립선언이나 헌법 어디에도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 조지 워싱턴 같은 사람은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에 반대했습니다. (...) 매디스, 해밀턴, 애덤스 등 다른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민주주의의 위험’을 제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혁명을 이루고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민중이 원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는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의미 있는 민주적 체제하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미국의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전망이 폭발해 나오는 것입니다.”
연방 홀 앞의 월가 점거운동
첫 번째 대목은 미국이 건국 초기부터 민주주의를 외면한 국가라는 말이고, 두 번째 대목은 현재도 미국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미국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던가?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정치학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 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청할 수 있는 나라”, “오늘 가난한 사람도 내일은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도 당당하게 투표할 수 있는 나라”라며 극찬할 만큼 민주주의의 모범국가가 아니었나?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지위가 잠시 흔들린 적도 있고 퇴색한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앞서가는 민주주의 국가인 건 사실 아닌가?
2.
나는 중국계 정치학자 왕사오광(王紹光)의 <민주사강(民主四講)>을 읽고 나서 의문의 상당 부분을 풀 수 있었다. ‘민주 사강’이란 민주주의에 관한 네 번의 강의라는 뜻이다. 왕사오광은 예일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홍콩 중문대학 정치 및 공공행정학과 명예교수이며 중국의 신좌파를 대표하는 이론가이다.
왕 교수는 민주주의가 과거 2000년 동안 ‘나쁜 것’으로 생각되다가 오직 최근 한 세기에 이르러 ‘좋은 것’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으며, 대의민주주의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민주의 원래 의미에 위배된다는 도발적인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엘리트와 유산자들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소수의 부자를 제멋대로 다루는 독재적인 제도라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 전통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 약 2000년 동안 이어져 오다가, 20세기 초에 비로소 대의민주주의와 보통선거라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만 해도 웬만큼 이름난 사상가는 죄다 민주주의를 싫어했다. 소크라테스는 민중이 무지해서 의견을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고 했고, 플라톤은 사회에는 반드시 존비의 서열이 있어야 한다며 철인정치를 주장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지력과 도덕면에서 불평등하게 태어나므로 정치제도를 설계할 때는 반드시 이러한 불평등을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는 평등이란 실제로는 가장 불평등하다고 했다. 중세에는 민주정치란 폭도들의 정치에 대한 별칭이라고 강변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재현한 장면
근대에 들어와서는, 인류의 미래는 오직 개명한 자만이 장악할 수 있다는 존 로크, 민주정체 아래에서 평등 정신은 극단으로 내달릴 것이라는 몽테스키외, 입헌 군주제를 지지한 볼테르, 민중은 무지몽매하고 무딘 존재라는 디드로, 민주주의는 불합리한 정치제도의 하나라는 이마누엘 칸트, 순수한 민주제는 세계에서 가장 뻔뻔한 것이라는 에드먼드 버크, 민주주의는 다수의 하층민이 소수의 상층부 사람을 반대하는 깃발이라는 프랑수아 기조가 있다.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계몽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들이 이처럼 민주주의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18세기에 오면 민주주의를 옹호한 사상가가 더러 눈에 띄는데 루소가 대표적이다. 루소는 인민주권의 확립을 주장하며 직접민주제를 옹호했다. 다만 민주주의는 아주 작은 국가에서, 민풍이 순박하고 도덕이 고상한 사람들에게만 적합하다는 전제를 달았다. 하지만 19세기에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사상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왕 교수는 말한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경우 역시 뜻밖이다. 1787년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열린 제헌회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의 성토대회 같았다고 한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혼란스럽다’, ‘우둔하다’, ‘분수를 넘는다’, ‘죄악’, ‘폭정’ 등의 용어를 써서 비판했다. 이 회의를 결성하고 이끌어갔으며 훗날 미국의 4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매디슨은, 민주주의는 필요 없고 입헌 공화제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취임 연설에서 ‘자유 정부’, ‘공화정부’는 언급했지만 ‘민주 정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민주주의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슬로건도 자유, 평등, 형제애였을 뿐 민주는 빠져있었다.
3.
유산자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사상가들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다수의 폭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산자 혹은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면 자신들의 재산권을 부정할 수 있다는 공포가 그들을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에 주류 사상가였던 사람들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나쁜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인민대중의 요구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19세기 30, 40년대에 영국에서는 남성의 보통 선거권 쟁취를 요구조건으로 내건 인민운동 헌장(차티스트 운동)이 출현하였다. (...) 이들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서구 엘리트층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부 사상가는 민주주의의 조류를 막기 어렵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민주주의의 조류에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유재산권의 유지라는 최후의 보루를 지켜내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했다. 민주라는 말 앞에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여 민주주의를 거세하고 길들이기로 했다. ‘자유민주’, ‘헌정 민주’, ‘대의 민주’, ‘절차적 민주’ 등이 바로 그 타협의 산물이다. 왕 교수는 “그 모든 수식어는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면서, “유산자와 그들의 대변자가 민주주의를 끌어안기 시작할 때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한 모든 이야기는 수식어가 딸린 민주주의였고, 수식어가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더 중요했다.”라고 설명한다. 왕 교수는 가령 ‘자유민주’는 ‘자유’를 ‘민주’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그것은 민주를 바로 새장 속에 가두는 것과 같다며, ‘자유민주’를 ‘새장 민주주의’라고 깎아내린다.
몇몇 사상가들이 나서서 ‘다수의 폭정’인 민주적인 권력에 대해 제약을 가함으로써 무한한 민주주의를 유한한 민주주의로 바꾸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을 왕 교수는 이렇게 요약한다.
“민주주의 최대의 위험이 공공 권력의 무한성에서 기인한다면 이러한 무한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공 권력에 명확하고 일정한 한계를 그어두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공공의 영역’ 안으로 한정해놓고 그곳으로부터 한 발짝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에 발맞추어 정치적 권위와 사회적 간섭을 받지 않는 사적인 생활영역을 구분하고,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개인적 권리의 불가침성을 강조하고, 자유를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삼고, 민주주의의 무한 권위를 제한해야 한다.”
토마스 페인,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제시한 타협책은 ‘대의’ 민주제였다. 왕 교수는 특히 대의 민주제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인물로 조지프 슘페터 (1883~1950)를 지목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몇몇 개인들이 인민의 표를 얻기 위한 경쟁을 통해 공공의 의사 결정권을 획득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정의하면서, 민주주의를 ‘인민의 지배’로부터 ‘인민이 지배자를 선택하는’ 것으로의 변화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로써 인민은 유권자로 바뀌었고, ‘민주(인민이 주인이다.)’는 ‘선주(選主, 주인을 뽑는다.)’로 변질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실질을 얼마나 바꾸어놓았을까? 왕 교수에 따르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참여하는 방식의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인민이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국가의 관리에 참여한다는 이념은 희미하게 잊히고, 참여는 일종의 간헐적인 행위 즉 4년 혹은 5년마다 한 번씩 투표하는 행위로 바뀌었으며, 그 이외의 시간에는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지낸다는 이유에서다.
왕 교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간접 민주주의라고 부르면서 직접민주주의와 그저 유형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일단 ‘간접’적이 되고 인민대중의 참여를 배척하는 순간, 민주정체의 실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하나의 정치체제로 바뀌어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반민주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왕 교수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제도는 추첨제다. 여기서 추첨제의 특징과 장점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추첨은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선거는 귀족제 과두제의 표지”라는 루소의 말을 기억해두면 좋겠다.
초창기 영국의회의 모습
4.
얼마 전 한 유명 작가는 민주주의는 ‘높은 수준의 문화적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필시 대의 민주제를 지칭할 텐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의 말은 틀렸다. 현재의 대의 민주제는 소수의 기득권자를 위한 제도이며, 대중의 참여를 배척함으로써 민주정체의 실질을 포기한 제도로, 결국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반민주적인 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이던 시절 국민‘참여’ 당을 창당해 대표를 지냈고, ‘참여’ 정부의 장관도 지냈다. 그러나 그의 정치 프로그램은 실패했고 그는 결국 정계를 떠났다. 그가 그처럼 ‘참여’에 신념을 걸었으나 결국 실패한 일에 대해, 대의 민주제는 그 제도 자체에 참여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뿐 아니라 참여를 밖에서 가져와 옮겨심기에는 너무나 폐쇄적인 제도임을 말해주는 증거로 해석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