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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걷어찬 나쁜 사마리아인들

by 까칠한 서생

*이 글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자본주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다. 스미스는 생산자가 아무리 이기심을 가지고 상품을 만들어 팔아도, 남거나 모자라지 않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시장이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준다고 보았다. 그런 시장의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했다. 또 베버는 낭비하지 않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자본가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는데, 그런 정신의 뿌리가 다름 아닌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있다고 보았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의 조화로운 질서를 뜻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가의 건실한 태도나 정신을 뜻한다. 자본주의는 이런 구절들과 어우러지면서, 많은 사람에게 깔끔하고 따뜻하고 세련된 신사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의 정사(正史)는 이 두 가지 말마디와 어울리는 풍부한 서사를 완성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영국은 18세기에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정책을 채택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눈부신 경제 성공으로 자유시장·자유무역 정책의 우수성이 명백해지자 다른 나라들도 역시 무역을 자유화하고 국내 경제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유주의적 세계질서는 영국의 패권 아래 1870년 즈음에 완성되었는데 이를 뒷받침했던 것은 자유방임주의적 국내 산업정책, 상품·자본·노동에 대한 국가 간 흐름을 막는 장벽의 완화, (중략) 거시경제의 안정 등이었다. 이렇게 되자 한동안 전례 없는 번영의 시대 이어졌다.”


케임브리지대의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세계화에 대한 이러한 기존의 해석이 근본적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오늘날의 거의 모든 선진국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배치되는 정책처분을 토대로 해서 부자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오늘날 부자 나라들은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 관세와 보조금을 사용했고, 외국인 투자자를 차별했으며, 외국인 투자 문제나 국영기업, 거시경제관리, 그리고 정치기구와 관련된 정책 등의 측면에서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정통적 견해에서 크게 벗어나 있음을 이 책은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첫 번째 세계화 시기(1870~1913)에 영국의 패권 아래 상품·사람·돈이 자유롭게 이동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 자유무역을 실천했던 나라들은 대부분 식민지 지배나 ‘불평등조약’의 결과로 자유무역을 강요당한 약소국이었다. 오히려 부자 나라들은 약소국에 자유무역을 강요하면서도 스스로는 매우 높은 관세를 유지했다고 한다. 가령 자유무역의 발상지인 영국의 경우 19세기 중반 자유무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손꼽히는 보호무역 국가였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부자 나라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이런 행태가 나쁜 줄 알면서도 강자의 논리로 낯 두껍게 밀어붙이는 ‘사다리 걷어차기’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자유무역, 자유시장 정책을 채택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가난한 나라들에 자유무역, 자유시장 정책을 권유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 유형이다. 이 두 번째 유형의 나라들은 개발도상국들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며, ‘사다리 걷어차기’ 유형의 나라들보다 더 심각한 골칫거리라고 이 책은 비판한다.


이 책에 따르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행태는 2차 대전 이후에도 이어졌다. 경제성장이 실패한 남미와 아프리카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이 훨씬 더 철저하게 실행된 곳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된 대부분 국가에서 오히려 소득 불평등은 더 심해졌고 성장은 멈칫거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결국 성장, 평등 안정 등 경제생활의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개발에 성공한 개발도상국들은 거의 모두 보호관세와 보조금을 비롯한 갖가지 형태의 정부개입을 활용하는 민족주의적 정책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 전략을 써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 나라가 있다면 바로 칠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홍위병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에 의해 주도된 칠레의 경제 실험은 결국 심각한 금융위기로 끔찍하게 막을 내렸다.


이 책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의 『영국 상업 발전 계획』(1728)을 통해 초창기 자본주의 시기에 튜더 왕조 시절 영국 산업정책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분석한다. 디포의 이 책은 한마디로 영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은 남들보다 먼저 번영의 진정한 경로를 찾아냈기 때문이라는 자본주의 창세기 신화를 산산조각 내고 있다고 장하준 교수는 파악한다.


디포의 『영국 상업 발전 계획』에 따르면, 당시 튜더 왕조는 유럽의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모직물 제조업을 영국에서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가 보호주의와 보조금, 독점권의 분배, 산업스파이 활동의 지원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로 개입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 책은 영국의 모직물 제조업을 발전시킨 것은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의 보호와 보조금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장 교수는 초대 영국 수상 로버트 월폴의 활동을 소개하는 내용에 특별히 주목했다. 월폴은 1721년 제조업 육성을 겨냥하는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 그에 필요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고 한다. 그 법의 기본 목적은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영국 제조업을 보호하고 수출을 장려하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수입된 외국 공산품에 대한 관세는 크게 올랐고, 제조업에 사용되는 원자재에 대한 관세는 크게 낮아지거나 아예 폐지되었으며, 공산품 수출은 수출보조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장려되었다. 나아가 공산품들, 특히 직물 제품의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규제까지 도입되었다. 이는 2차 대전 후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에서 경제적으로 ‘기적’을 일궈낸 일본, 한국, 대만 같은 국가들이 적극 활용해 성공을 거둔 정책들과 매우 유사하다고 장 교수는 평가한다.

『영국 상업 발전 계획』에 따르면, 영국은 또한 식민지들이 자국의 제품과 경쟁하게 될 만한 제품의 국내 유통과 수출을 금지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당시 영국산 면직물보다 품질이 우수했던 인도산 면직물(캘리코)의 수입을 금지했고, 1699년에는 식민지들이 다른 나라로 모직물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아일랜드의 모직물 산업을 파괴하고 미국 내 모직물 산업의 출현을 막았다. 최종적으로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가 1차 상품만을 생산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원료에 대해 미국 쪽에는 수출보조금을 지급하고 영국 쪽에는 수입세를 폐지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러한 정책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이 영국 제조업의 경쟁자로 부상하는 일이 없도록 1차 상품 생산에 확실하게 묶어두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 교수는 “식민지 사람들은 이렇듯 가장 수익성이 높은 ‘하이테크’ 산업을 영국의 손아귀에 곱게 남겨두어야 했으니, 영국이 경제발전에서 세계 최선두를 달리는 혜택을 누리는 일은 떼어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라고 소개한다.



미국 제품에 대한 관세는 1860년에야 비로소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한다. 장기간 지속되어온 높은 관세 장벽 뒤에 숨어 경쟁국들을 누르며 기술적 우위를 획득하고 나서야 자유무역을 채택한 영국의 이런 행태를 두고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부른다. 장 교수는 이렇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가장 열심히 저항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그 중심에 알렉산더 해밀턴의 ‘유치산업 보호론’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해밀턴은 『제조업에 대한 보고』에서 미국과 같은 후진적인 나라는 외국의 경쟁으로부터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그 산업들이 자기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19세기 내내, 그리고 1920년대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무역 국가였음에도 미국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사다리를 걷어찬 영국의 길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2차 대전 이후 공업 분야에서는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우위를 점하게 된 미국은 무역을 자유화하고 자유무역의 대의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장 교수는 자유무역 옹호국인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경우 세계를 지배하는 산업 강국이 되기 전까지는 영국이나 미국만큼 강력하게 보호무역 정책을 펼친 나라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은 모두 유치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관세, 보조금, 외국무역에 대한 규제와 같은) 국가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했음을 확인했다. 장 교수는 이런 경험에서 배우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이 자유무역과 자유시장 정책을 통해 발전했다는 널리 알려진 신화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시장, 자유무역 정책을 강요해왔다는 사실도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하지만 사다리 걷어차기보다 더 심각하고 더 널리 퍼진 것이 역사에 대한 건망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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