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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지 못한 나라의 부끄러운 밀리언셀러_1

<정의란 무엇인가>와 설민석&김지윤의 오독

by 까칠한 서생

*이 글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3대 마피아가 ‘고려대학교 교우회’, ‘해병대전우회’, ‘호남향우회’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을 묶어서 만든 “호남에서 태어나 해병대를 다녀와 고려대를 졸업하면 어딜 가도 굶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이젠 식상한 농담이 되었다.


이들보다 더 강력한 마피아가 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재경부 관료들을 일컫는 모피아, 해경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해피아, 군의 고위 간부로 이루어진 군피아, 원전과 관련된 이익집단인 원전마피아, 검사 출신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에 더욱 주목받는 검피아 등 ‘관피아’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집단에 속하면 굶어 죽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50억 클럽’에서 보듯 팔자를 고칠 만큼 크게 한몫 챙기기도 한다. 관피아는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사유화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확장할 수 있는 집단이라, 전통적인 3대 마피아는 동네 양아치밖에 안 된다. 이들 집단에 범죄조직인 ‘마피아’에서 따온 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이들이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대단히 배타적이고 편협하게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때론 불법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데 대한 조롱이자 야유일 것이다.


이들 집단도 일종의 공동체다. 공동체에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이들 집단이 잘 보여주듯 배타적이고 편협한 이미지도 있다. ‘공동체주의’란 공동체가 지닌 이러한 장단점들이 모두 담겨있는 가치이자 이념이다. 이 ‘공동체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인물이 바로 하버드대학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이고, 이러한 그의 노력이 잘 담겨있는 책이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다. 흔히들 오해하듯이 이 책은 단순히 정의에 관한 여러 견해를 나열한 책이 아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자유적 공동체주의’가 이 시대의 정의론으로 왜 적합한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책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나라에서 200만 부가 넘게 팔린 대형 밀리언셀러다. 영미권에서는 10만 부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그 책이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대박을 터뜨린 이유로는 흔히 불평등에 관한 한국인의 민감한 관심과 정의에 대한 과도한 요구가 꼽힌다. 그런데 밀리언셀러가 된 이유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책의 효과다. 즉 그렇게 많이 팔린 그 책이 우리 사회에 과연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1993년 제1권 출간)는 때마침 맞이한 마이카시대 바람을 타고 전국에 답사 여행의 붐을 일으켰고, 김정현의 장편소설 『아버지』(1996)는 많은 국민에게 가족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헌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더 정의로워지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까?


때로 이 책은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은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설사 책을 산 200만 명 중 절반 아니 1/4만 읽었다고 해도 엄청난 숫자다. 의사가 주된 독자인 <청년의사>라는 전문지에서 2011년 실시한 간이 조사에 따르면 의사 네 명 중 한 명꼴로 이 책을 사거나 읽었다고 한다. 2019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판사들이 판결할 때 이 책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소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의 한국판이 나온 2010년 이후에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어야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정의로워지는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는 자기 나라를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의 비율이 미국은 38퍼센트인데 우리나라는 74퍼센트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우리나라의 2022년 부패인식지수(CPI)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38개국 중에서 22위로 여전히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50억 클럽’으로 상징되는 권력형 부정부패와 사회지도층의 부패 카르텔은 날로 지능화하고 있으며, ‘갑질’로 표현되는 권위주의적 태도는 사회 곳곳에 만연하고 있다. 물론 200만 부 밀리언셀러가 나왔다고 해서 그 사회가 그 책이 주장하는 대로 바뀌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의로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정의의 반대편으로 역주행하는 듯한 이 현상을, 정의 관련 밀리언셀러 보유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먼저 이 책이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독자들은 마이클 샌델이 강조하는 ‘샌델 표’ 정의관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특히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에 올라 있는 수많은 책 소개(리뷰) 영상 가운데 조회수가 가장 많은 두 개의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영상 중 2023년 3월 말 현재 조회수 1위는 136만 회를 찍은 ‘설민석 영상’이고 2위는 33만 회를 찍은 ‘김지윤 영상’이었다. (‘이지영official’ 채널에 올라와 있는 조회수 110만 회짜리 영상도 있지만, 책 전체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트롤리 딜레마’라는 하나의 사례만을 소개한 내용이라 제외했음) ‘설민석 영상’이란 역사 강사 설민석이 tvN의 책 소개 프로그램 중 이 책을 소개한 부분을 30분 정도로 편집한 콘텐츠를 말하며, ‘김지윤 영상’이란 정치학자 김지윤이 자신의 채널인 ‘김지윤의 지식 Play’에 올린 18분짜리 책 리뷰 콘텐츠를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영상에는 샌델이 강조하는 ‘샌델 표’ 정의관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설민석 영상’의 경우, 기존의 여러 정의관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샌델이 비판하는 기존의 공동체주의를 샌델의 정의관인 양 소개하는 한계를 보였다. ‘김지윤 영상’의 경우 자유의 대립 항으로 공동체를 소개하지만 이를 공리주의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샌델이 비판하는 공리주의를 오히려 옹호하는 등 책을 충실히 소개하기보다 자신의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체계에 책 내용을 꿰어 맞춘다는 느낌이 강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부분적으로 책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공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책을 오독(誤讀)함으로써 독자 또는 시청자를 오도(誤導)하고 있었다. 가장 모범적이고 전문적인 독자일 것으로 기대했던 이들이 이렇다면 일반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들의 소개 영상으로 책읽기를 갈음하려 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책을 잘못 이해했을 소지도 다분하다.



이 책을 구매한 200만 명 중 상당수는 샌델의 정의관인 자유적 공동체주의, 그리고 그가 특별히 강조한 공동선·시민의 덕성·자치·좋은 삶 등의 개념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책은 서가에 처박아둔 채 ‘설민석 영상’이나 ‘김지윤 영상’으로 퉁 쳤거나, 설사 읽기 시작했더라도 샌델의 정의관이 집중적으로 담겨있는 9장까지 가기 전에 책을 덮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들은 샌델이 비판하는 공리주의나 자유주의 또는 자유지상주의 정의관을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정의관을 선택하기에 따라서 이 사회를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바꿔 말해서 공리주의나 자유주의 또는 자유지상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한 사람이라면 이 사회가 정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적 공동체주의를 지지하는 내가 보기에, 자신만이 옳다고 우기는 악다구니들과 상대방을 도륙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망나니들과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입을 싹 씻는 철면피들이 갈수록 설치는 이 사회도, 그들 눈에는 엄연히 정의로운 사회로 보이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소름 돋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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