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우리를 배반한 근대>(엄창호 지음, 2023년 6월 여문책 발행)에 수록되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나라에서 200만 부가 넘게 팔린 대형 밀리언셀러다. 얼핏 생각하기로, 이 책의 한국판이 나온 2010년 이후에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문제는 이 책이 정의에 관한 여러 관점과 사상가들을 단순히 나열하고는 그중 하나의 관점과 사상가를 골라잡으라는 책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는 데 있다. 어쩌면 인터넷 서점에 올라 있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문 탓에 그런 오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 소개문은 이렇게 되어있다.
"저자는 이 책에 ‘정의’에 대한 확고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외려, 책을 읽는 독자들도 위대한 사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갈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바로잡는 기회를 만나는 획기적인 프레임을 선사하고, 나아가 그들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한다."
“확고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라는 표현부터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혹시 사람들은 이 소개문을 접하며, 정의에는 답이 없고 다만 여러 사상가의 정의관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어느 정도까지 확고해야 ‘확고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실은 샌델이 이 책에서 ‘답을 내리는’ 정의관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적 공동체주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여러 개념과 사상가 그리고 사례들이 치밀한 계산에 따라 배치되어, 마이클 샌델이 오랫동안 갈고 다듬어온 ‘자유적 공동체주의’라는 정의관의 타당성을 훌륭하게 설득하고 있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역사상 중요한 정의관들을 하나씩 점검하면서 가장 올바른 정의관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먼저 하나의 사례를 통해 복지·자유·미덕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추출한 다음, 그들을 각각 공리주의·자유주의(그리고 자유지상주의)·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다음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개인적 선택의 자유를 중시하는 칸트와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그리고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를 그 특징과 함께 한계를 지적한다. 다음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해서 시민의 덕성과 공동선을 중심에 두는 정의관을 소개하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운 다음, ‘서사적 자아’와 ‘연대의 의무’라는 개념을 빌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자유적 공동체주의’라는 새로운 정의관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새로운 정의관에 입각해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제안한다. 요약하면 1장에서 8장까지는 기존의 몇 가지 중요한 정의관들을 하나씩 등장시켜 한계를 지적한 다음, 마지막 두 개의 장(9장, 10장)에서 새로운 정의관을 설득하며 마무리한다. 이렇듯 이 책은 10개의 장이 긴밀하게 연결되며 ‘자유적 공동체주의’라는 정점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가도록 치밀하게 구성된 책이다.
그렇다면 ‘샌델 표’ 정의관인 ‘자유적 공동체주의’란 무엇인가? 우선 간단히 줄이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장점만을 살려 융합한 관점이다. 이는 샌델의 다음 진술에서 그 취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일까? 만약 인간이 자발적 존재라는 관념이 약한 것이라면(만약 우리의 모든 의무가 우리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를 소속된 존재이자 자유로운 자아로 볼 수 있겠는가? "
자유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의무는 오로지 두 가지, 인간이기에 생기는 자연적 의무와 합의에서 생기는 자발적 의무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우리가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된다. 자유주의 사상가 롤스에 따르면, 일반 시민은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의무 외에는 동료 시민에게 특별히 다른 의무를 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반대편에 공동체주의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공동체의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길>이라는 해제를 쓰고 샌델표 자유관에 ‘자유적 공동체주의’라는 용어를 붙여준 철학자 김선욱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연대성, 민족성, 언어, 정체성, 문화, 종교, 역사, 생활방식 등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그리고 공동체란 시민권, 계급, 인종적 혈통, 문화적 정체성 등을 중심으로 연대를 이룬 집단을 말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정한 가치를 절대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샌델은 공동체주의가 공동체 구성원들이 덕성을 기르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등의 장점도 있지만, 특정 공동체가 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탓에 보편적 인권을 부정하는 억압적인 이념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김선욱 교수도 공동체주의가 자칫 파시즘, 인종주의, 전체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앞의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 샌델의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안을 모색한 끝에 찾아낸 대안으로 보인다. 그는 이를 설득하기 위해 두 개의 개념을 동원한다. 하나는 ‘서사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연대 의무’다.
‘서사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사람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라는 영국의 철학자다. 샌델이 소개하는 매켄타이어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의 정체성을 지닌 자로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런저런 도시의 시민이며, 이런저런 조합 또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다. 나는 이런저런 친족, 부족, 나라에 속한다. 그러므로 내게 좋은 것은 소속 집단 사람에게도 좋아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친족, 내 나라의 과거로부터 다양한 빚, 유산, 정당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기정사실을 구성하며 내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이는 부분적으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삶은 어떤 통합이나 일관성을 염원하는 서사적 탐색을 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매킨타이어의 생각이다. 누구든 개인으로만은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도덕적 사유의 서사적 측면은 우리가 전체에 속하는 구성원이라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샌델은 이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연대 의무’라는 또 하나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연대 의무’는 ‘서사적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내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결부된다는 인식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는 어느 나라든 애국심을 강조하고, 지나친 이민 유입을 제한하고, 외국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 자국인만을 구출할 수 있는 이유는 연대 의무를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대한민국이 강점기에 행한 일본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할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샌델은 연대 의무를 통해 기존의 공동체주의가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연대의 의무는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로도 향한다면서 “내 나라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는 일은 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밝힌다. 연대의 의무를 지게 되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자부심과 함께 수치심도 느낄 수 있으며 책임감도 동반한다고도 말한다. 자유적 공동체주의는 이런 점에서 기존의 공동체주의가 지닌 배타성과 편협성, 그리고 집단 이기심을 극복한 개념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이 책은 정의와 권리를 말할 때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대로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배제한 채 중립적인 위치에 서는 일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질문에 대한 샌델의 대답은 “아니다” 이다. 그 대답의 핵심에 자리 잡은 키워드가 바로 ‘공동선’이다. 그는 국가가 정의를 위한 판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중략)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개입한다. (중략)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에 관해 경쟁하는 여러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점을 한 가지만 지적한다. 샌델이 이 책에서 다룬 공동체는 주로 국가공동체이거나 현실 정치의 영향을 받는 공동체이다. 또 그가 말하는 공동선(共同善)은 ‘common good’이 아니라 대체로 공공선(公共善)이라 번역되는 ‘public good’에 가깝다. 따라서 이 책은 국가나 정치의 영향과 무관하게 시민들의 자치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공동체나 그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글자 그대로의 공동선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