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을 읽었다. 이완용 같은 인물의 평전을 읽는다는 건 사실 매우 불편한 일이다. 모름지기 평전이란 귀감이 되는 영웅이나 호불호가 교차하는 문제적 인물에 대해 그 인생궤적을 따라가며 최대한 객관적인 해석과 평가를 내림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주는 글의 형식이다. 그런데 이완용은 만인의 공적이자 역사의 죄인으로 이미 낙인 찍힌 작자가 아닌가. 그의 삶에서 또 무슨 평가를 기대할 것이며, 새삼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책을 펼쳐든 까닭은 19세기말~20세기초 우리 역사의 격동기에 당시 통치 엘리트들 (이완용과 고종을 비롯 개화파, 친일/친러/친미파, 위정척사 및 수구세력)의 생각과 행적을 생생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이를 통해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의 남루하고 스산한 역사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결과적으로 그 기대는 상당히 충족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명색이 평전이니만큼 최대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야할 텐데, 한 인물을 일방적으로 도륙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기우였다. 오히려 지나친 미화가 눈에 거슬릴 정도였다.
저자는 이완용을 한 마디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근대인'으로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너무 생뜽맞아서 뜨악했다. '합리'니 '실용'이니 '근대인'이니 하는 말조차도 실은 바람직한 가치를 지닌 긍정적인 용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데다가, 그마저도 이완용에게 적용하려면 엄청난 논리적 비약을 감수해야 하는 개념인데, 저자는 별도의 개념정의도 없이 그런 무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합방'후 고종 등 왕족의 지위를 협상하는 대목에서는 가령 이덕일의 <근대를 말하다>와 상반되게 이완용을 옹호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거슨 식민지 근대화론의 한 변종이 아닐른지...
내 판단은 이렇다. 고종은 국가와 독립에 관해 낡고 어설픈 철학과 비전으로 청나라-->러시아-->미국-->유럽 그리고 결국에는 일본으로, 대상을 바꿔가는 식의 '외세 돌려막기' 잔재주를 부리며 나라의 운명을 외국에 의탁하려 한 사대주의적 군주였고, 이완용은 고종 바로 곁에서, 때로는 한두 발자국 앞서서 뛰어난 잔머리로 그 길로 안내한 보신주의적 관료 따까리였을 뿐이다.
이 시대에는 '이완용'이 은유일 수밖에 없다. 나라를 통째로 딴 나라에 넘겨주는, 액면에 가까운 '이완용'은 불가능하겠고, 대체로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손해를 안겨주면서 다른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넘겨주는 인간의 은유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 더 원초적인 은유가 떠올랐다. 주류나 대세의 가치와 이해관계에 편승해서 그것을 진리인듯이 호도하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 진보진영에든 보수진영에든 이런 의미의 '이완용들'이 설쳐대고 있다. 이번 대선은 세종대왕을 뽑는 선거이기 전에 이런 '이완용들'을 가려내는 행사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