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법칙'을 위반한 소설
김탁환의 <사랑과 혁명> 읽기를 중단하며
1~3권을 다 합해서 1,500쪽이 넘는 김탁환의 '역사소설' <사랑과 혁명>을 큰맘 먹고 손에 들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나는 80쪽도 넘기지 못한 상태에서 이 작품 읽기를 거두기로 했다. 아무리 전체의 5퍼센트밖에 안 되는 분량만을 읽었다고는 해도, 그때까지 이야기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감도 잡지 못할 내용을 내가 굳이 참고 읽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쪽에 무슨 엄청난 감동과 재미와 의미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인내나 짜증과 맞바꿀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체호프의 법칙에 따르면, “연극 1막에서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라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3막에서 발사될 총은 반드시 1막에서 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건이든 묘사든 인물의 등장이든 전체 이야기 속에서 역할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원칙이기도 하고, '총'으로 상징되는 핵심 갈등이 초입에서 반드시 암시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극작가인 안톤 체호프는 연극을 전제하고 이 법칙을 말했겠지만, 소설을 포함한 서사 장르에도 적용되는 금과옥조라고 생각한다.
안톤 체호프(1860~1904)
문제는 <사랑과 혁명>의 1막(앞부분)에는 아무리 봐도 '총'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배경이 지루하게 나열되고 있을 따름이다. 도대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어디로 이끌어갈 요량일까? 책의 앞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 한 대목에서 왜 이 작품이 지루할 수밖에 없는지를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절망과 희망, 미움과 사랑, 의심과 믿음을 갈라 언행을 평하고 답을 구하지 않았다. 편을 가르는 순간,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다. 둑엔 금이 가고 마을은 무너진다. 배교와 치명 사이, 교우 마을과 외교인 마을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더 오래 들여다보고자 했다. 흐릿하고 복잡하고 지루한 혼돈의 날들이여! 스미고 젖어 빛이 되기도 하고 어둠이 되기도 했다. 빛이 어둠이었고 어둠이 빛이었다.”
이 표현에 따르면 작가는 ‘흐릿하고 복잡하고 지루한 혼돈’을 묘사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것, 마치 물에 술 탄듯 술에 물 탄듯... 그것도 한 편의 소설일까? 이런 내용을 감내하면서 읽어줄 필요가 있을까?
문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서사장르의 특징은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있는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이다. 이에 따르면, 대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이 세계와 어떻게 대결하는지가 소설을 포함한 서사 장르의 핵심이자 흥미와 긴장을 이끌어내는 요소일 터. 그러니 흐릿하고 복잡하고 지루한 혼돈을 묘사하는 것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서사의 원칙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내 판단으로는, 대결을 통한 긴장과 몰입이 없이 단순한 혼돈의 묘사만으로는 소설이 되기 어렵다.
두 권 합쳐 3만 원이 넘는 이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게 너무나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