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했나
<프랭클린 자서전>을 읽고 느낀 자괴감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1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프랭클린 자서전>)을 드디어 읽었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덕성을 자세히 알게 된 소득이 물론 컸지만, 그보다 더 내가 주목했던 건 당시 미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이었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주로 18세기 중반, 1776년 독립선언이 선포되고 미국이 독립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대개 조선 영조 연간이다.
당시 조선은 노론이 일당독재의 기반을 확고히 장악해가고 있었고 교조적인 성리학이 모든 백성의 사고방식을 점점 더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임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과학발전이 장려되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있는 등 백화제방의 분위기가 만개한 사회였다. 일반적인 미국사에는 어떻게 나와있는지 몰라도, 이 책에는 분명 그렇게 나온다. 비교할수록 우리 역사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우리에게 능력과 덕성에서 프랭클린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집권세력은 그들에게 어떤 짓을 했던가. 예컨대 천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므로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을 주장한 정여립의 목을 쳤다. 한때 성리학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산 정약용을 18년동안 귀양살이 시켰고 그 집안은 폐족이 되었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이 자서전이 미국독립혁명 과정에서 프랭클린의 빛나는 활약을 다루지 않은 점은 끝내 아쉽지만, 미국이 그 이후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정치와 경제, 학문과 예술,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로 자리잡았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물론 지금은 그 위치가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분명한 건 미국은 섣불리 비판하거나 우습게 볼 나라가 아니라는 점. 우리가 '4.19혁명'이나 '촛불혁명'을 통해 대통령 하나 바꾼 성과로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다 거머쥔, 민주주의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행세하는 건 좀 낯뜨거운 일이다.
내 소감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 "벤저민 프랭클린보다 그를 키워낸 당시 미국 사회가 훨씬 더 훌륭했다." 어떤 인물보다 그를 키워냈기에 훨씬 더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과연 우리에게도 있을까?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어떤 훌륭한 인물보다 늘 작았거나 비겁했거나 쪼잔했다. 다산이 살던 사회는 다산보다 훨씬 작았고, 이순신이 살던 사회는 이순신과는 반대로 매우 비겁했으며, 전태일이 살던 사회는 전태일의 말 한마디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쪼잔했다. 세종대왕 정도가 예외일까, 우리 사회의 영웅은 언제나 '실패한 영웅'이었다. 그것이 우리 역사의 비극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맨 오른쪽이 벤저민 프랭클린.
<프랭클린 자서전>에 나오는 인상적인 몇 구절을 소개한다. 주로 그의 덕성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논쟁을 좋아하는 것은 그리 좋은 대화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논쟁 그 자체에 빠지면 무조건 상대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우게 되어 대화를 망치고 흥을 깨게 되며, 그러다보면 상대를 혐오하거나 증오하게 되어 관계가 악화되기 마련이다.
-반론이 나올 것 같은 의견이라 하더라도 ‘확실히’, ‘정말’, ‘의심할 여지없이’처럼 단정적인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또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러이러할 겁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태도는 내가 추진하고 있는 일로 사람을 납득시키고자 하거나 내 뜻을 관철하는 데 효과가 컸다.
-[시인 포프의 명언] 사람을 가르칠 때는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해야 하고 그 사람이 모르는 일은 깜빡 잊고 있는 것처럼 여겨라. (...)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겸허하게 말해야 한다.
-[지인인 벤저민 보간이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당신의 글은 그들의 삶보다 월등히 평화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큰일을 하면서도 가정적일 수 있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나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나도 가끔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는 목표가 일종의 도덕적 허영은 아닐까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 알면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완벽한 인간은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딘지 허점이 있는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찾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완벽하다는 게 사실 그리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난 절제 덕분에 지금껏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다. 근면과 절약 덕분에 젊은 시절 가난을 벗고 재산가가 되었고, 그것으로 지식을 얻어 쓸 만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학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또 진실과 정의 덕분에 국가의 신뢰를 얻었고, 더 나아가 명예로운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원하는 만큼 완벽하게는 아니었어도 이런 덕목들이 융화되어 내게 큰 힘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위기에 처했을 때도 항상 침착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기분 좋게 어울릴 수도 있었다.
-‘자만심’처럼 굴복시키기 어려운 감정도 없다. 아무리 감추고, 때려눕히고, 억누르고, 쓰러뜨려도 자만심은 기회 있을 때마다 머리를 쳐들고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