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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서생 Feb 24. 2024

지금 이곳에서 철학하기

한병철의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를 읽고

한병철의 신작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 책은 하나의 주제로 완결된 본격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다양한(그러나 일관된) 주제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즉 피로사회/투명사회/사물의 소멸/에로스의 종말 등 지난 십여 년간 한병철이 펼친 생각들 중 초기 주요 개념의 진액만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책만을 읽는다고 해서 그의 철학을 한큐에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용이 워낙 압축적이라 선행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웬만큼 따라 읽어온 사람이라면 그의 철학체계 전체를 조망하기에 좋다. 나는 특히 부록으로 실은 대담이 좋았다. 개념들이 빽빽하게 박혀있는 특유의 사변적 문어체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전달되는 구어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주제를 다루는 공리공론이 아니라, 현재 보편적인 인류가 부닥치고 있는 문제의 뿌리를 파헤치는, 현실의 사유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철학은 다름 아닌 '지금 이곳의 철학'이어야 한다는 것. 헤겔도 니체도 하이데거도 푸코도 들뢰즈도 모두 당대의 문제에 대한 사유의 결과로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다고 나는 알고 있다. 철학사에 살아남은 진정한 철학자는 바로 그런 인물아닐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은 헤겔철학, 니체철학, 하이데거철학, 푸코철학, 들뢰즈철학이 아니라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는 '지금 이곳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 등의 철학은 지금 이곳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영역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한병철은 그동안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명의 음모를 파헤치고 인류사적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이 책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를 포함해서 그의 일련의 저작들은 일관되게 바로 그 주제를 다룬다. 그렇게 '지금 이곳의 철학'을 해왔다는 에서 그는 진정한 철학자라고 평가받을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철학은 관조하는 삶에서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철학마저 같음의 지옥의 일부가 되어버렸어요." 현재의 강단철학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통렬하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컨대 헤겔, 니체, 푸코 같은) 특정인의 철학을 할 뿐, 지금 이곳의 철학을 하는 철학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글은 매우 정치(精緻)하다. 빈 틈 없이 정교하고 치밀하다는 얘기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밀도가 워낙 높아서, 무심코 밑줄을 치다 보면 자칫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치게 된다. 그래서 핵심문장(key sentence)을 뽑아서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몇 가지 문장들을 뽑아본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 유지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산 채로 매장한다. 생존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죽은 가치를, 자본을 축적한다. 죽은 자본이 생동하는 세계를 없앤다. 이것이 자본의 죽음충동이다. 삶을 생명 없는 사물들로 변환하는 네크로필리아(屍姦症)가 자본주의를 지배한다.”


“자본주의 조직화의 기반은 욕구와 소망이며, 이것들은 소비와 생산에 반영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소비 및 향유 양식이 되면서 평준화된다. (...) 타자는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나르시시스적 주체는 그런 타자에 달라붙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다. 다름을 빼앗긴 타자는 단지 소비된다.”


“점점 더 심화하는 사회의 디지털화가 인간 삶의 상업적 착취를 훨씬 수월하게 만들고 확대하고 가속한다. 디지털화는 이제껏 상업적 활용이 불가능했던 생활영역을 경제적 착취에 예속시킨다. (...) 오늘날 지배는 디지털 전체주의 형태를 띤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국가감시의 희생자가 아니라 시스템 안의 적극적 실행자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사적인 피난처들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디지털 연결망에 내맡긴다. 디지털 연결망이 우리를 속속들이 침범하고 조명한다.”


“디지털 통제사회에서는 포르노적 전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하나로 합쳐진다. 거주자들이 외적 강제가 아니라 내적 욕구에 따라 자기를 알릴 때, 바꿔 말해 사적이며 친밀한 영역을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영역을 부끄러움 없이 내보이려는 욕구에 밀려날 때, 그리고 자유와 통제가 구별 불가능하게 될 때, 감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


“투명사회는 긍정사회다. 사물이 모든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매끄러워지고 평평해질 때, 자본과 소통과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저항 없이 편입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 특유의 긍정성을 띤 투명사회는 같음의 지옥이다. (...) 투명성은 다름이나 어긋남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화하고 가속한다.”


“자아 혼자서는 의미를 산출하지 못한다. 수집된 데이터는 다음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일까? 휴대용 고해소인 스마트폰은 자기 인식을 제공하지 않으며 진실에 접근할 길도 열어주지 않는다. (...) 데이터는 성과와 효율을 벗어난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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