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노동과 임금노동 사이에서 길을 찾다
금요일 오후, 갑자기 아이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일까. 애써 걱정을 외면하며 전화를 받았다.
“선율이가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네요.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지금 데리러 오실 수 있나요?”
“아,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봤다. 예정되어있던 온라인 좌담회까지 1시간이 남았다. 마무리하던 원고를 내버려둔 채 차를 몰고 학교에 갔다. 운전을 하며 ‘얼마나 아픈 걸까, 설마 코로나는 아니겠지? 열은 안 난다고 했는데.’ 아이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는 한편 ‘왜 하필 오늘이야. 좌담회는 예정대로 할 수 있을까?’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염려했던 것보다 아이 상태가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집에 와서 열을 재니 38.5도. 열이 좀 오르는 것 같아 해열제를 먹이고, 좀 자겠다고 해서 전기장판을 켜준 뒤 방문을 닫았다. ‘지금 선율이를 재우면 선우는 어떻게 데리러 가지?’ 아이가 둘이면 이럴 때 참 난감하다. 고민 끝에 선우 반에 친한 엄마에게 전화해 대신 픽업을 부탁했다.
허둥지둥 하는 사이 좌담회 시간이 다 되었다. 오늘은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국의 코로나 상황과 백신접종현황에 대해 소개하고, 지난 3월 8일에 있었던 세계 여성의 날을 각각 어떻게 기념했는지, 해당 국가에서 여성의 삶은 어떤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영국에 살고 있는 나는 며칠 전부터 자료를 찾고, 현지 친구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육아, 가사 외에 얼마만의 공적인 ‘일’인지.
“엄마!! 엄마아!!”
좌담회 중간쯤 아이가 심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다가 아파서 깼는데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오지 않더란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더 올랐다. 급히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고 “엄마 일하던 중이야, 못 들어서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기운이 쭉 빠진다. 이번주에 중요한 스케줄이 이거 하나였는데 딱 오늘, 이 시간을 골라서 아프니.
늘 그런 식이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 일이 너무 하고 싶었던 나는 여성학과 대학원 동기 언니가 소개해준 시 연구용역 공동연구자 모집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 ‘아이는 어떻게 하지? 아직 돌도 안 되었는데.’ 다행히 동네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영아전담 어린이집을 찾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회의를 다녀오고 아이가 잠들면 보고서를 썼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치워도 치워도 어질러지는 집안을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올리듯 반복하던 삶에 지쳐갈 때쯤, 어제 하던 작업에 그대로 깜빡이고 있는 커서가 그렇게 위안이 되었다. 그 작은 성취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에도 윤기를 주었다.
그러나 아직 면역력이 약한 시기에 공동생활을 하는 아이는 수시로 아팠다. 감기에 걸리면 중이염으로 발전해서 2주가 넘게 항생제를 먹여야 하는 식이었다. 열이 나면서 귀가 아프다고 우는 아이를 두고 회의를 갈 수 없는 노릇. 나는 그 때마다 “죄송한데, 아이가 아파서요.”하며 회의를 미뤘다.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것은 아이가 없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모래주머니를 양쪽에 두 개를 차고 달리는 것과 비슷했다. 속도도 더디고 자주 넘어지고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나 자신을 점점 포기하고 그 빈자리를 아이로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렵게 끝낸 연구용역이 좋은 인연이 되어 다음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고양시의 보육정책위원, 저출산대책위원, 여성친화도시위원으로 위촉되어 자문 회의에 참여했다. 연구 보고서도 쓰고, 교회 청년들 대상으로 페미니즘 강의도 하고, 페미니즘 독서모임 튜터로 참가했다. 영 일이 없을 때는 자료조사나 보고서 수정, 녹취 알바도 마다하지 않았다. 늘 경제적으로 빠듯했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수입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는 게 좋았고, 무엇보다 가정에서 벗어난 나만의 일은 언제나 소중했다.
그렇게 프리랜서 연구자로 조금씩 경력이 쌓여가던 중, 갑자기 남편이 영국 주재원 발령이 났고, 두 달 뒤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아이를 학교에 적응시키고, 영어로 된 숙제를 봐주고, 서투른 요리 실력으로 삼시세끼를 하면 하루가 갔다. 게다가 학교 이메일은 또 얼마나 많이 오는지. 1년 뒤 이제 좀 적응할만하니 코로나가 찾아왔다. 이제 학교 문도 닫고 온라인 학습이란다. 엄마가 선생님 노릇까지 해야 하는 상황.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외치던 시간이 다 지나가고 드디어 다시 학교 문을 연 것이 이번 주 월요일. 영국 와서 처음 섭외받은 일을 하는 오늘, 아이가 아프다니 맥이 탁 풀렸다. 엄마노릇이란 참으로 끝이 없다.
그래도 아이를 달래가며 좌담회는 무사히 끝냈다. 급하게 준비했지만 좋은 피드백도 받고 스스로도 나름 의미있게 기여를 한 것 같아 뿌듯하다. 열이 나서 많이 힘들어하던 큰 아이는 나의 정성스런 보살핌 덕분인지, 해열제가 잘 들어선지 저녁이 되니 열도 내리고 기운을 차렸다. 코로나 봉쇄령으로 몇 개월간 집에만 있다가 갑자기 학교를 가니 몸과 마음에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앓느라 점심도 못 먹어서 배가 고플 것 같아 죽을 끓여서 떠먹여주니 제법 받아먹는다. 다행이다.
퇴근한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이 글을 쓴다. 앞으로도 어려운 순간이 있겠지만 일과 육아, 둘 다 포기하지 말자고, 엄마이면서 나 자신이 되는 일을 절대 놓지 말자고 다짐한다. 아이만 키우는 전업맘도 아니고, 매일 출근해야하는 워킹맘 아닌 나. 그래, ‘반업맘’이라 부르면 어떨까. 비록 폼나고 안정된 직장은 없지만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는 반업맘 말이다. 물론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있지만 양쪽에 양해를 구하면서 그러나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계속해보려고 한다. 아이들이 클수록 내가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더 커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이만하면 꽤 괜찮은 하루였다. 내일은 더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