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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May 10. 2021

런던에 눈이 내리면

눈이 오는 날엔 우리가 엄마 아빠를 끌고 나가지

  시작은 충동적으로 산 썰매였다. 둘째 선우랑 동네 약국을 가는 길에 어느 세 식구가 썰매를 사가는 걸 봤다. 지난 1월 평소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런던에 함박눈이 쏟아졌을 때 집에 썰매가 없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다음 날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 눈 모양이 두 개로 바뀌어 있었다. 눈이 많이 온다는 뜻! 동네 철물점에서 파란 썰매를 덜컥 사서 아이랑 나란히 들고 돌아오는 길,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소를 띤 채 말을 건넸다.


"내일 눈이 오면 좋겠네."

"엄청 재밌을거야!"


  집에 와서 자랑스럽게 썰매를 들어 보이는 우리를 보고 남편은 이걸 왜 사왔냐고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과 함께 내일 눈이 많이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다음 날, 야속하게도 예보는 바뀌었고 함박눈은커녕 진눈깨비도 내리지 않았다. 일요일부터 눈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지만 그저 바람에 날리는 싸리눈일 뿐이었다. ‘썰매를 괜히 샀구나. 그럼 그렇지. 영국에 온지 3년 동안 한 번도 눈이 안 왔는데, 저번 한 번의 행운이었으면 됐지, 또 오겠어? 12파운드 날렸네 흑.’ 썰매는 세탁기 뒤로 치워졌다.




  화요일 아침, 아래층에서 재택근무하던 남편에게 메세지가 왔다.


"오늘은 눈이 꽤 쌓이겠는데?"


이어서


 "아침에 일어날 때보다 눈발이 더 굵어졌어."


그 다음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 대박인데. 이미 썰매 타는 사람들도 있어!"


야호! 내 작은 소원도 들어주시는구나.


"얘들아, 오늘 썰매 탈 수 있겠어!"


아이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오전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후다닥 먹은 뒤 다 같이 공원으로 향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공원은 경사가 꽤 있어서 썰매를 타기 안성맞춤! 이미 아빠, 엄마, 아이들, 할아버지, 할머니, 휠체어에 탄 아이까지 골고루 눈 오는 날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서둘러 합류했다. 남편과 내가 번갈아 가며 아이들 썰매를 끌어주고, 사진과 동영상을 추억으로 남겼다.


"자, 이번엔 내 차례!”


  남편이 잠시 놀라는 듯 했지만 있는 힘껏 최고 속력으로 끌어주었다. 스키도 보드도 못 타는 나지만, 눈썰매는 탈 수 있지! 어린 아이처럼 신나게 썰매를 탔다. 다음은 아이들이 루돌프가 되어 나를 태워주었다.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 썰매도 끌어주니. 새삼 아이들의 성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나는 눈 오는 날을 그리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내릴 때는 설레지만 도시에 내리는 눈은 블랙 아이스로 변해 금방 지저분해진다. 얼어서 빙판길이 되면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걷느라 신경이 쓰였다. 서울에선 눈이 많이 온다면 걱정부터 하던 나였는데, 지금은 눈썰매 하나로 눈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신나게 놀고 있다니! 생각해보면 이건 다 아이들 덕분이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존재들이고 그 놀이의 세계에 자주 우리를 초대한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은 솔직히 힘에 부치고 따분할 때도 많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어른인 척 하느라 잃어버렸던 순수한 놀이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어린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즉, 함께 레고블록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빵을 만들고, 야구를 하고, 모래성을 쌓음으로써)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허락받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무언가를 창조하는 존재, 무언가를 쌓는 존재.”

-  제니퍼 시니어, ‘부모로 산다는 것(All Joy and No Fun)’


  아이들이 없었다면 점점 나이 들어가는 나와 남편, 친구들, 그리고 여기 저기 편찮으시고 연로하신 부모님 등 나를 둘러싼 세계가 다 늙어갔을테지. 하지만 아이들이 있어 희망이 있다. 나는 쇠퇴해가지만 저들은 눈부시게 자라고 있으니! 그걸 맨 앞자리에서 볼 수 있는 관객이 된다는 게 부모됨의 특권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기억나지 않는 유년을 다시 한 번 산다. 온갖 어려움과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부모됨의 축복이 있다면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 선우가 말했다.


"눈 오는 날이 최고야!"


선율이가 말을 받았다.


"엄마 아빠는 해가 나면 우리를 끌고 나가는데 눈 오는 날엔 우리가 엄마 아빠를 끌고 나가지. 밖에 춥다고 나가지 말라고 해도 말이야.”


  눈과 진흙으로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고 작은 난로에 손을 녹이며 핫초코를 후후 불며 나눠마셨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나중에 그리워할 우리들의 추억이 또 하나 생겼다. 아이들은 잊어버린다 해도 내 마음에는 남아 두고 두고 꺼내볼 오늘, 런던에 눈 온 날. 거봐 남편, 내가 뭐랬어, 썰매 사기 잘 했다니깐!






Photo by Wooj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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