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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Sep 24. 2021

그릇, 이곳은 출구 없는 세계

요알못 그릇 덕후의 삶이란


  “앗, 자기야, 닭에서 빨간 피가 나.”     


  요리 초보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닭볶음탕. 첫 관문인 닭을 손질하다 놀라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크크크, 그럼 파란 피가 날 줄 알았냐.”     


  어이없이 웃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는 생닭을 손질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있지만, 요리는 늘 관심 밖이었다. 시금치를 한 단 가득 사서 다듬고 데쳐서 물기를 꼭 짜고 나면 고작 한 줌밖에 안 되는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일해서 번 돈으로 시금치나물을 사 먹으리라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친정엄마가 때마다 밑반찬을 고루 보내주셨고, 동네에 반찬가게도 여럿 있어서 밥하고 국만 끓이면 그럭저럭 한 끼 식사가 가능했다. 밖으로 나가면 식당도 입맛대로 골라갈 수 있고, 배달은 또 얼마나 편리하게 잘 되어있는지. 어린아이 둘을 키우면서 삼시 세끼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요리조리 도움받을 길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런데 영국에 오니 상황이 달라졌다. 일단 외식비가 만만찮은 탓에 나가서 먹는 게 쉽지 않다. 이 나라에서는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모든 것이 비싸다. 괜찮은 식당에서 남편과 둘이 식사를 하고 나면 일주일 치 식비가 고스란히 날아간다. 기분 좋게 먹고 나서 계산서를 보면 “아이고, 담엔 그냥 집에서 해 먹자”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좀 저렴한 식당을 찾으면 음식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걸 여러 번 경험해본 터. 소위 ‘가성비’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지불하는 가격과 나오는 음식의 질이 정비례하는 영국에서 외식이나 배달은 특별한 날에나 가능한 이벤트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모두 원재료뿐, 결국 내 손으로 먹을 만한 것을 만들어내야 나와 가족들을 굶기지 않을 수 있다. 매일 생존 요리가 늘 수밖에.     


  그나마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아침은 시리얼, 점심은 급식, 저녁만 신경 쓰면 됐는데 문제는 코로나. 2020   동안  번의 봉쇄정책으로 슈퍼마켓, 약국  필수 업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식당은 포장만 가능했고, 학교 문을 닫고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한  6개월. 매일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간식 포함 다섯 끼를 먹는 녀석들을 먹이는 일이었다. 기약 없는 똑같은 하루의 반복, 누구를 만나서 마음을 나눌 수도 없는 외로운 시기에 음식마저 같은  먹고 싶지 않아 매끼 다른 요리를 시도했다. 그나마 요리를 삶의 낙으로 여기는 남편이 파스타, 보쌈, 잡채 같은 주말 특식을 담당해줘서 주중만 감당하면 되었지만, 실상 내가   아는 요리라는  그렇게 다양하지 못했다. 주로 반찬이 필요 없는 떡만둣국, 우동, 볶음밥 같은  그릇 요리가 선택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돌려 막기 식의 메뉴가 점차 지루해지고, 똑같은 식탁이 고루하게 느껴졌다. ‘그릇이라도 좀 바꿔볼까? 근데 어디서 사지?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동네 채리티 숍이나 앤틱 마켓을 기웃거려볼 텐데.’ 지금은 다 문을 닫은 상태. 인터넷에서 그간 눈여겨본 몇몇 그릇 브랜드명을 쳐보았다. 페이지는 주로 이베이(eBay)로 연결되었다. 이베이, 이곳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한국에서 넘사벽 가격이라 감히 결제로 이어지지 못했던 빈티지 그릇들이 저렴한 가격에 즐비했다. 어차피 식당도 닫아서 외식도 못 하는 마당에 네 식구 한 끼 식사 값이면 근사한 빈티지 그릇 여러 세트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모은 아이들이 지금은 좁은 찬장에 빼곡히 찼다.     


  이베이는 주로 경매(bidding) 방식이라 막판 눈치작전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 인기 있는 품목은 입찰자가 여러 명이 붙는데 처음부터 뛰어들면 가격을 올리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관심 목록에 추가해놓고 지켜본다. 경매 종료가 다가온다는 알람이 뜨면 그때부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막판 5분 전 부터 열심히 가격경쟁에 참여하되 미리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선 이상으로 넘어가면 깨끗이 포기한다. 마음에 쏙 드는데 아무도 입찰자가 나타나지 않아 초 저렴한 가격에 득템 한 경우가 가장 좋지만 내 눈에 예쁜 건 남의 눈에도 예쁜 법.

  우아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초록 빛깔의 독일산 찻잔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마감 직전까지 아무도 비딩을 하지 않길래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종료 30초 전에 누가 나타나 채 갔다. “아웃비드(outbid): 죄송합니다만 해당 상품을 놓치셨습니다.” 알람을 보고 얼마나 얄밉던지. 그 뒤로는 훈련받은 사냥개처럼 마지막까지 경계를 놓치지 않는다.

  기억나는 성공사례도 있다. 치열한 막판 클릭 경쟁에서 낙찰받아 내 품으로 온 로얄코펜하겐 블루플라워 세트. 다른 브랜드 제품보다 훨씬 고가라 고민했지만 사용한 적이 없이 잘 보존된 제품이라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백자를 연상시키는 시리도록 하얀 바탕에 덴마크에서 자주 보인다는 꽃들이 진한 코발트 컬러로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청아한 느낌이라 어떤 음식을 담아도 고급스럽게 잘 어울리고 단단하고 묵직한 만듦새도 마음에 든다.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부엌의 예술품인데 실생활에서 사용도 가능하고, 이제는 단종되어 쉽게 구하기 어려운 희소성까지, 헤어날 수 없는 빈티지 그릇의 매력이란.       


  취향이 담긴 나만의 그릇 컬렉션이 생기다 보니 생산국이나 브랜드별로 나름의 특징이 보인다. 먼저 가장 구하기 쉬운 건 역시 영국 그릇. 그중에 제일 대표적인 건 ‘퀸즈 웨어(Queen's ware, 여왕의 자기)’라 불릴 만큼 디자인과 퀄리티면에서 왕실의 인정을 받은 웨지우드다. 이런 화려한 꽃무늬 금 테두리 접시들은 데일리로 쓰기보다는 손님 초대용. 식탁을 화사하게 밝혀주는 효과가 있어 봄·여름에 가장 잘 어울린다. 단점이라면 세척이 까다롭다는 점. 금장이 둘린 아이들은 손 설거지로 조심조심 닦아내야지 식기세척기 사용은 금물이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역시 아라비아 핀란드, 로스트란드 같은 북유럽 출신 그릇에 손이 많이 간다. 베이지, 그레이, 네이비 등 차분한 색감이 가을·겨울 식탁에 더 잘 어울린다. 벌써 50~60년 된 아이들인데 지금 봐도 어찌나 세련되고 독특한지. 허나 영국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고 가격 자체도 높게 형성되어 있어 운이 좋아야지만 하나씩 만날 수 있다.

  계절과 상관없이 제일 자주 쓰는 그릇은 역시 독일 제품, 내 사랑 빌레로이 앤 보흐. 웨지우드가 쨍한 백색에 화려하고 섬세한 편이라면  빌보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아이보리에 핸드 페인팅이 주가 되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더 강하다. 접시 가장자리로 금장 대신 초록색, 갈색 테두리가 둘려있어 식기세척기 사용도 가능하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둘 다 잡은 아이들. 작은 빵 접시 하나에도 독일식 실용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영국에 처음 와서 닭 손질을 못 해 쩔쩔매던 나는 이제 닭볶음탕은 물론 닭칼국수도 척 끓여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하고많은 날 책이나 들여다보던 내가 매끼 요리를 하고 그릇에 이토록 마음을 쏟게 되다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 집콕의 시대, 벗어날 수 없는 숙명 같은 부엌일 무한루프를 좀 더 견딜만하게 만드는 방법이랄까? 매일 아침 ‘오늘은 뭘 입을까?’ 옷장 앞에서 잠시 서성이는 것처럼 ‘어떤 찻잔을 쓸까, 어떤 접시에 담아낼까’를 고민하는 짧은 설렘의 시간. 아름다운 물성이 주는 확실한 위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깜깜한 터널 같은 한 시절을 버텨내게 해 주었다. 그렇게 들어선 그릇 덕후의 길. 이제는 정말 그만 사야 하는데. 어느새 다시 이베이 창을 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아, 이곳은 정말 출구 없는 세계. 똑똑, 택배 아저씨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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