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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Nov 19. 2021

집에 도둑이 들었다

영국에서 겪은 별별 일의 최고봉

  

  어느 평범한 월요일 오후였다. 여느 때처럼 하교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찰칵,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이상하게도 평소 공기와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희한하네. 이게 왜 여기에 떨어져 있지?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진 쇼핑백을 하나씩 집어 들며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1층 거실 서랍장, 주방 싱크대 상·하부장 가릴 것 없이 문이란 문은 다 열려 있고, 안에 있던 물건들이 죄다 쏟아져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악, 이게 뭐야?” 처음엔 당최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멍했는데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도둑이 들었구나.’


  영국에 살면서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었지만 직접 당하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있는 집도 아니고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게다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는 시간에 맞춰 들어왔으니 이 시간에 내가 규칙적으로 집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 그동안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일과와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특히 소름 끼쳤다. 혹시 아직 위층에 있는 건 아닐까? 도둑이 든 집을 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그들과 직접 마주치는 일일 게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벌벌 떨리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일단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인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방금 학교에서 같이 걸어온 동네 친구 샤메인 생각이 났다. 그녀라면 선뜻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정인.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해.”

 

  “나 지금 너무 떨려서 제대로 말을 못 할 것 같은데, 혹시 와줄 수 있어?”


  “알았어. 지금 당장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달려와 준 친구와 함께 999(영국의 범죄신고 전화번호는 999다) 로 전화해 사건 경위를 진술했다. 일단 사람이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한 경찰은 늦어도 24시간 내로 방문할 테니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란다. 네? 저기요, 24시간이라고요?!


  다행히 몇 시간이 지난 뒤 경찰이 도착했다. 지문 감식을 하러 온 여성 경찰관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 보니 각 방의 상황은 1층보다 더 처참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쓰는 3층 침실은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모든 옷과 가방, 서랍 속 물건들이 바닥에 쓰레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경찰은 은빛 특수 분말을 집안 곳곳에 묻혀 범인의 흔적 하나라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연히 장갑을 꼈겠지, 그렇게 허술했을 리가. 처음 경험해보는 과학수사는 어떤 성과도 없이 그렇게 종결되었다.


  경찰이 다녀간 뒤 초토화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피해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 일단 중요한 노트북과 카메라, 아이패드 같은 전자기기는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노트북은 식탁 위에 있었는데도 손대지 않았다. 주위에 물어보니 쉽게 현금화 할 수 있는 금, 보석, 현금을 노리는 거라고 했다. 특히 아시아인들이 집에 금을 둔다는 소문이 있어서 자주 표적이 된단다. 결혼예물도 한국에 다 두고 왔고, 집에 특별히 값나가는 물건이 없던 터라 잃어버린 건 같이 사는 사촌 동생의 오래된 명품 가방과 남편의 새 운동화, 현관 앞에 둔 한국산 마스크 40여 장 정도. 위드 코로나 이후 마스크 쓰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든 영국에서 왜 굳이 마스크를 훔쳐 갔는지 의문이지만 오죽 가져갈 게 없으면 그런 자잘한 물건을 가져갔겠나. 도둑이 선택한 예상 밖의 아이템에 웃음마저 났다.


   그날 이후로 경찰 측과 몇 번의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업무가 체계적으로 연계되지 않는지 매번 같은 질문과 답을 반복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들이 강조했던 것은 범인 검거보다 내 정신 건강이었다.


  “저기 근데, 피해자분은 괜찮으신 거죠? 필요하시다면 심리 상담을 연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2017년 당시 총리였던 테레사 메이가 정신보건 개혁안을 발표한 이후 영국에서는 신체 건강 못지않게 정신 건강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부상했다. 그 일환으로 범죄 피해 이후 정신적으로 타격은 없는지 확인하는 매뉴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오맙지만 내 정신건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빨리 범인이나 잡아 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저 “노 땡큐”로만 답했다.


  사실 범인 검거에 큰 기대가 있는 건 아니었다. 주변에서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다, 수사 의지가 없더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 자료를 찾아보니 영국에서 주거침입 절도죄는 가장 흔한 범죄로 평균적으로 108초에 한 번씩, 즉 한 시간에 34번씩 일어난다고 한다. 계산해보면 하루에 816건인 셈이다. 그에 반해 경찰 인력과 예산의 감소로 95%가 미해결 상태라고. 실제로 사건 발생 후 2주가 지난 뒤에서야 경찰이 방문해 집이나 이웃에 CCTV가 있는지 확인했다. 별 소득이 없자 며칠 뒤 추가적인 증거가 없으니 사건을 종결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강력범죄 검거율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서 온 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여기는 영국.


  결국 개인적으로 보안을 강화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집주인에게 말해 도둑이 망가뜨린 현관문 잠금장치를 수리하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이중 잠금을 철저히 하기로 했다. 바깥에서 잘 보이는 곳에 CCTV를 설치하고, 창문에 경고 문구를 담은 커다란 스티커도 부착했다. 집을 비울 때는 꼭 거실 등을 켜놓을 것. 진작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후회했지만 인간은 경험의 산물인 것을. 피해를 본 집의 63%가 기본적인 보안장치가 없는 집이었고, 그중 1/3이 다시 털린다고 하니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보안 시스템 설치가 필수적이었다.


  그래도 이날이 최악으로만 기억되지 않는 건 아낌없이 손을 내밀어준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신고하는 걸 도와준 샤메인은 남편과 내가 집을 치우는 동안 아이들 저녁을 해먹이고, 읽기 숙제까지 봐줬다. 혹시 집에서 자기 불안하면 방을 내줄 테니 자고 가도 된다고 여러 번 권하기도 했다. 저녁 늦게 아이들을 찾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데 그녀가 붙잡았다.


  “혹시 잠깐 기도를 해줘도 될까?”


  “물론이지.”


  영국교회 목회자 부부인 샤메인과 남편 팀이 우리 가족을 둘러싸고 기도를 해주었다. 오늘 밤 두려움 없이 잠이 들기를,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를 빌어주다 울먹이는 소리를 들으니 나도 같이 울컥했다. 돌아오는 길 성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생각났다. 강도를 만난,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살뜰히 보살펴주고, 치료비까지 내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타국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우리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돕는 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 다정한 위로가 상처 입은 마음에 보호막을 씌워주어 그날 밤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엉망인 집을 다 정리해 겨우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최대치의 놀람과 공포로 시작해 이만하기 다행이라는 안도감,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감동의 눈물, 극강의 피곤함까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하루. 그저 평범했을 하루가 원치 않는 손님의 방문으로 가장 극적인 날이 되었다. 사적이고 안전하다고 여긴 공간이 침해당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불쾌하지만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고 사람이 다친 게 아니니 감사함이 더 크다. 나중에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되려나. 타국에서 난생처음 도둑 사건을 겪고 오만 감정이 들끓지만 결국 감사함으로 귀결되는 걸 보니, 영국에 살면서 나도 제법 내공이 튼튼해졌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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