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마음
2023년 새봄을 이야기하려면 지난겨울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년 말, 1년 반 동안 쓰던 영국 생활 원고를 마무리하고 투고에 매진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출판사 리스트 말고 직접 도서관, 서점,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이메일 주소를 수집하고 하나하나 메일을 보냈다. 쉽지 않을 거라 각오는 했지만 계속되는 거절에 자존감마저 바닥을 쳤다. 가뜩이나 어렵다는 출판시장에서 초보 작가 아니 작가 지망생이 출판사의 눈에 드는 게 쉬울 리가. 아무래도 나는 글 쓸 자격이 없나 보다...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인문 교양서와 에세이를 주로 내는 출판사인데 보낸 원고 중에 ‘영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꼭지가 마음에 든다고 같이 만들어갈 생각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이런 메일이 오기도 하는구나. 놀랍고 기쁜 마음에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일주일 뒤 출판사와 미팅을 했다. 출판사에서는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내 이력에 주목해서 영국의 여성정책, 젠더 관련 법에 대해서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다.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은 해보겠다고 했다. 샘플 원고와 목차를 작성해 연말까지 보내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부터 관련 자료를 모으고, 책을 주문했다.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자료 뭉치를 읽어 내려갈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여성학을 전공하고 영국에서 3년을 살다 오긴 했지만 영국 여성 전문가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생생한 현장 인터뷰를 하지도 못하고 자료에만 의존해 영국 여성문제, 그것도 정책과 법에 대해 책 한 권을 써낼 자신이 없었다. 허나 이런 귀한 제안을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최선을 다해 자료를 읽고 원고를 쓰고 목차를 짰다. 매일 책상에 앉아있으니 소화불량과 변비, 두통, 불면증에 시달렸다. 12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원고와 목차를 넘겼다.
새해가 밝았다. 긴 검토의 시간이 지나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고심을 많이 한 흔적이 느껴지는 길고 정중한 메일이었다. 내게 기대했던 것은 여성정책 관련 전문성이 아니라 그 주제를 잘 소화해서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에세이였다고. 내가 보낸 글은 쓰는 사람의 특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 신문 기사 같다고 책으로 내긴 어렵겠다고 했다. 속상하기보다 홀가분함이 더 컸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내려오는 글이어야 독자들의 마음에도 가닿을 수 있는데 이번에 쓴 글은 머리만 맴돌다 끝났다는 것을. 무리하게 끌고 가지 않고 결단을 내려준 출판사가 고마웠다.
미뤄두었던 영국 생활 원고를 묶어 독립출판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원고가 책으로 나올 의미가 있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나 스스로 내 글에 최대한의 예우를 해주고 싶었다. 저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보다 잘 마무리 짓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래야 지난 시간에 진정한 마침표를 찍고 새롭고 가볍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쌓인 먼지를 털듯 묵은 글을 매만지고 제 자리를 찾아주며 두 달을 꼬박 보냈다. 2월 마지막 주 <영국 탐구생활>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좌절과 환호, 한숨과 안도의 숨을 오가며 한 계절이 지나갔다.
봄이 다가오면서 몇 가지 글쓰기 모임에 신청했다. 그중 하나가 <아름다움 수집 일기>를 쓰신 이화정 작가님의 ‘봄 글방’이다. 안준철 시인의 <나무에 기대다> 시집을 읽고 올해 나의 봄을 맞이하는 마음에 관해 쓰는 과제를 받았다. 첫 책이 시집이라고 해서 내심 긴장했다. 나름 애서가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시’와는 아직 내외하는 사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 코너를 서성이지만 품고 돌아온 적은 거의 없다. 좋다는 시집을 추천받고 덜컥 사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잘 와닿지 않는 난해한 구절에 거리감만 더 생겼다. 그런데 어라, 이 시집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시어들이 쉽고 순했다. 이해되지 않는 시가 없었다. 틈나는 대로 가지고 다니며 읽으면서 책 귀퉁이를 접고, 밑줄을 긋는 부분이 많아졌다.
봄이 온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봄이 온다는 것은
아직 세상을 끝낼 마음이 없다는 거다
- 봄이 온다는 것은 중에서
동네 한 바퀴만 돌다가 와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눈빛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한때는 얼마나 깊어지길 바랐던가
- 옅어진다는 것 중에서
내 몸에서도 꽃 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푸릇푸릇 돋아나는 것들이 있다
지금은 나무에 기댈 시간
사는 일이 기쁘고 감사하다
- 나무에 기대다 중에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도(‘해찰’이라는 단어만 낯설어 사전을 찾았다)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의 극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집을 읽어 내려가면서 올해 새봄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봄이 온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아직 세상을 끝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해마다 성실하게 돌아오는, “딴마음 품지 않은 봄”에게 고마워졌다. 더불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웠다. 나에게서 길어낼 수 없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좇느라 애쓰지 말고 그저 사는 것처럼 쓸 것. 깊어지기를 욕망하기보다 옅게 스며드는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쉬운 언어로 순해진 마음으로 다만 자세히 관찰하면서. 혹 지치고 답답한 날이 오면 나무에 기대 가면서 그렇게 받은 위로로 사는 일이 기쁘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며 살고 또 쓰고 싶다. 이번 봄엔 마치 생에 첫봄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작은 변화에도 호들갑을 떨어볼 작정이다. 내 마음도 두툼한 외투를 벗고 가볍고 화사한 봄옷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