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나트랑에서는
내년이 벌써 결혼 15주년이다. 평소라면 소박하게 축하하고 넘어가지만 15주년이라니 뭔가 근사한 이벤트를 벌여보고 싶었다. 5주년, 10주년도 그냥 지나갔으니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따뜻한 나라 리조트, 우리도 한번 가볼까? 요즘 많이 간다는 베트남은 어떨까? 이럴 땐 바로 알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재빨리 검색에 돌입했다. 세계 문화유산이 몰려있는 다낭, 최근에 각광받기 시작한 푸꾸옥을 지나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나트랑에 시선이 머물렀다. 가족들에게 공유하니 아이들은 얼른 가고 싶다고 성화였다. 얘, 얘들아... 지금 가는 거 아니야. 내년이라니까?!
며칠 뒤 주말 아버님을 뵈러 갔다. 식사 중에 문득 아버님과 같이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셔서 세계 방방곡곡 많이 다녀보셨지만, 여행 파트너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혼자 계시는 아버님. 장례 치르고 꼭 1년 뒤에 우리 가족이 영국으로 떠날 때 무척 허전해하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못 오셨던 게 늘 마음에 걸렸더랬다. 남편과 복화술 및 눈빛 교환을 한 뒤 슬며시 아버님께 말을 꺼냈다.
“아버님, 저희 내년에 나트랑 여행 갈까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좋지! 언제?”
역시 두 번 고민하지 않으시는 분. 내년 초 결혼기념일쯤 맞춰서 가면 어떨까요, 했더니 예상치 못한 말씀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이제 한 해 한 해가 달라. 내년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아니. 그러지 말고 올해 봄 일 시작하기 전에 가자.”
5년 전 암으로 급격히 병세가 나빠져 우리 곁을 떠나신 어머님이 떠올랐다. 그래, 시간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지. 농사지으시는 아버님이 바빠지시기 전에 부랴부랴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다. 틈나는 대로 블로그와 베트남 여행 카페를 들락거리며 정보를 수집했다. 남편이 휴가를 길게 내기가 어려워 나트랑 시내 1박, 리조트 2박으로 일정을 짰다. 베트남은 처음인 데다 3대가 함께하는 여행이니 익히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어느덧 출발일이 다가왔지만 막상 가려고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올해 초 책을 내고 나서 여러 글쓰기 모임에 가입해 둔 터라 읽을 책과 써야 할 원고 마감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남편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직장인처럼 글을 써라”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다음 주가 마감인 원고가 세 편인데 아직 초고도 시작 못 했으니 이를 어쩐다.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싸며 꽉 찬 캐리어 안에 꾸역꾸역 노트북과 못다 읽은 책을 밀어 넣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나트랑에 도착했다. 숙소에 간단히 짐을 풀고 나서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베트남 하면 또 쌀국수지! 음식이 입에 맞을까 걱정했는데 뚝배기에 나오는 뜨거운 쌀국수 국물이 어찌나 시원한지! 명치끝에 내내 얹혀있던 기내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속을 달래고 나니 기운이 번쩍 났다. 나트랑 여행, 시작이 좋았다.
이후에도 걱정이 무색하게 가는 식당마다 대성공이었다. 맛있는 데다 가격까지 저렴하니 식도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가족에게 베트남은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늘 패키지여행만 하신 아버님은 생애 첫 자유여행에 푹 빠지셨다. 가이드의 깃발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지 않아도 되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결정하니 여행의 재미를 더 느끼시는 듯했다. 무엇보다 에너지 넘치고 귀여운 손자들과 함께하니 그보다 즐거울 수가.
시내 구경을 마치고 이틀째엔 리조트로 넘어왔다. 배정받은 16층에서 내려다보면 짙은 쪽빛의 바다에 뾰족뾰족한 야자수가 줄지어 있고 하얀 바탕의 리조트 건물마다 에메랄드빛 수영장이 보석처럼 박혀있는 광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초록 잔디에 진분홍 다홍 보라 하양 형형색색의 꽃나무로 이루어진 조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신혼여행 이후로 동남아 리조트는 처음이라 다른 곳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휴양지 하면 기대하는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와...!!!” 모두가 말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첨벙첨벙 손과 발을 내저을 때마다 뽀그르르 흩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우리들의 웃음소리도 함께 흩어졌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과 동영상으로 눈과 마음에도 고루 담았다. 여행 와서 아버님이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좋다”와 “고맙다”였다. 가는 곳마다 너무 좋다고, 같이 오자고 해줘서, 잘 계획하고 준비해 줘서 고맙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오늘은 아버님과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수영장으로 내보내고 리조트 거실 식탁에 앉아 글을 썼다. 내일이 마감이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원래는 봄글방에서 ‘내 생애 특별했던 그해의 봄’이라는 주제를 받고 생각해 둔 방향이 있었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아침나절을 보내는 동안 네 남자는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빨갛게 익어버린 얼굴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아이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어른들은 탁구를 쳤다. 핑퐁 핑퐁- 어설픈 내 솜씨에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시는 아버님을 보며 최애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과거로 돌아가 만난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탁구를 치던 주인공 팀의 모습이.
불현듯 깨달았다. 다른 주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인생에 가장 특별한 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맞은 우리의 봄, 아버님의 일흔 번째 봄, 나와 남편의 마흔한 번째 봄, 우리 아이들의 열 번째, 여덟 번째 봄을 우리는 계속 추억하고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것을. 같은 봄이지만 다섯까지 다른 빛깔로 기억될 2023년의 봄, 아버님을 따라 나도 나직이 속삭여본다. 함께 해서 좋다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 원제는 ‘그 해 봄 냐짱에서는’이었지만 봄글방 이화정, 변미숙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다섯 빛깔의 봄’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제안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