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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Mar 29. 2023

하고 싶은 것을 묻는다면

북 리뷰: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레모 출판사

  

“너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주재원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영국에 간 첫 해, 대학동문들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남자 선배가 물었다. 남자들끼리 골프 치러 가고 싶은데 남편이 내 눈치를 보자 꺼낸 말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골프를 하면 다음 주말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멍했다. 내가 망설이자 남편이 얼른 말을 받았다. “정인이는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주말에 가족끼리 같이 있는 걸 좋아해.”

    

  내가 답할 말을 남편이 가로채는 것도 불쾌했지만 그 말이 맞는다는 게 더 속이 상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임신 초기 심한 입덧으로 시도 때도 없이 구역질하면서도 꾸역꾸역 다녔던 직장은 임신 사실을 알리자 곧 계약 종료되었다.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돌쟁이 아기를 영아 전담 어린이집에 맡겼지만 감기에, 수족구에, 장염에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많았다. 당장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두고 회의에 갈 수 없는 노릇.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며 나는 매일 작아졌다. 두 아이를 기르며 조각난 시간에 프리랜서 연구자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갈 때쯤, 남편을 따라 낯선 나라로 오게 되었다.      


이게 결혼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이 우울을 택하는 것, 둘이 함께하는 것은 낭비다. 내 자리는 아이 곁이고, 그의 자리는 영화관이며,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영화관에 갔다. 나중에 그는 여름이면 테니스 치러 갈 것이고, 겨울이면 스키 타러 갈 것이다. 나는 아이를 보살피고 산책시킬 것이다.
-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레모 출판사, 231쪽.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쓴 소설 『얼어붙은 여자』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자세를 곧추세웠다. 아니 에르노는 성역할 구분 없이 자유분방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결혼 후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촘촘히 그려낸다. 1940년생 작가가 1981년에 쓴 소설을 같은 해에 태어나 41세를 맞은 내가 읽는데도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씁쓸하다. 아이들과 있는 게 힘들다고 할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그럼 자기가 나가서 돈 벌어오든가.” 어느 날은 북받쳐서 쏘아붙였다. 당신이 일하고 내가 집에 있는 이유는 당신이 잘나서도 내가 못나서도 아니라고. 당신이 남자이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지금 나간다고 해도 경력단절로 당신만큼 벌어올 수가 없다고. 그 뒤로 남편은 두 번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4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 전, 홀로 기차를 타고 1박 2일 북 스테이를 다녀오면서 그날의 저녁 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하고 싶은 게 뭐냐는 간단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 나는 이제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은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글을 쓰면서 늘 자신과 마주하는 덕인 것 같다. 시작은 안 그래도 외로운 외국 생활에 코로나 봉쇄령까지 겹쳐 집에 갇혀있었던 날들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낮엔 아이들에게 매여 있으니 모두 잠든 밤만이 방해받지 않고 쓸 수 있는 내 시간. 새벽까지 깨어 문장을 짓고 얼기설기 기워진 채라도 완성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삶이라 해도 공들여 쓰고 나면 정성을 다해 살고 싶은 새 마음이 찾아왔다. 돌아보니 언제나 그곳이 시작점이었다.



제목은 얼어붙은 여자인데 읽고 나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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