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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Apr 04. 2023

영어, 소유에서 누림으로

북 리뷰: 김성우, <단단한 영어공부>, 유유출판사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영국에 온 뒤 당장 급한 건 아이들 학교였다. 분명 배정을 받았다는데 연락이 없다기에 남편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했더니 이런, 단칼에 거절이다. ‘아니, 아무리 바빠도 전화 한 통 할 시간이 없는 거야?’ 속으로 씩씩거렸지만 방법이 없다. 학부 복수전공이긴 했지만 엄마가 된 후 영어 한마디 벙끗할 일이 없었던 세월이 어언 10년……. 게다가 낯선 영국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얼굴을 마주 보면 표정이라도 읽고 제스처라도 할 텐데 오직 음성에만 의존해야 하는 전화영어는 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날 도와줄 사람은 오직 나뿐! 무조건 해내야 했다.


  일단 백지를 꺼내 들고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적었다. 두 번 세 번 입에 붙을 때까지 읽어본 뒤 학교 오피스로 전화를 걸었다. 뚜뚜뚜- 신호가 울리더니 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미리 연습한 대로 천천히 대사를 읊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반 배정이 다 되어 있으며 준비되는 대로 언제든 등교해도 된단다. 휴... 미션 컴플릿! 작은 성취감이 밀려왔다.


  한 번의 고비를 넘자 그다음은 더 용기가 생겼다. 그 흔한 헬로 하나 못 하고 기죽은 아이들을 대신해 학교 엄마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다들 어려운 건 당연하다며 따뜻한 응원을 건네주었다. 새로운 만남과 초대에도 적극적으로 응했다. 물론 못 알아듣고 미소로 때운 적도 많지만 내가 움츠러들지 않아야 아이들이 더 잘 적응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그 덕분에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고 영국 사회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봄 한정 부드러운 슈크림라떼와 함께 한 단단한 영어공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 기자단에서 함께 읽을 첫 번째 책이 영어공부 관련 도서라는 걸 알고 반가웠다. 초등학교 때 처음 영어를 접한 뒤로 늘 잘하고 싶은 그러나 여전히 자신 없는 분야가 영어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단단한 영어공부’. 부제는 ‘내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의 기본’이란다. 영어공부가 어떻게 단단할 수 있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뭔가 평소 익히 봐온 영어 학습서와는 다른 결인 것 같다. 표지는 그림 하나 없이 녹색 영어 명조체와 검은색 한글 고딕체로만 디자인되어 있는데 세련되고 경쾌한 느낌이다. 일단 만듦새가 좋고 유유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 읽기 전부터 기대감 상승!


  머리말을 펼쳤다. 응용언어학자인 김성우 선생님은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우리를 성장시키기보다는 줄 세우고, 뿌듯함보다는 상처를 주며, 성취감보다는 좌절감을 선사할 때가 많다(12쪽)”고 진단한다. 입사시험이고 자격시험이고 영어가 기본이라는데 영어라면 도망부터 가고 싶은 소위 ‘영포자’들이 속출하는 건 내남이 알고 있는 사실. 중·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꼬박 10년 이상을 공부해도 입 한마디 떼지 못하는 입시 위주 영어교육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성찰 없는 암기, 소통 없는 대화, 성장 없는 점수 향상을 넘어 우리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영어공부에 대해 고민하자(13쪽)”고 초대한다. 좋은 책은 머리말만 읽어봐도 알 수 있지. 문제의식이 선명하고, 본문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느껴지는 좋은 프롤로그다.      



언어는 취해야 할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으로, 특정 언어와 학습자를 소유가 아니라 관계 relations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산과 바다를 소유할 수 없듯 언어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 김성우, 『단단한 영어공부: 내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의 기본』, 유유 출판사, 33쪽.     



  본문을 읽다가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언어는 자원이 아니라 환경이며, 소유가 아니라 관계라니. 영어에 관한 상식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이다. 여태 단어를 많이 알고, 문법 구조를 암기하고, 귀가 뚫릴 때까지 반복 청취해서 영어를 정복(!) 해야 한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지 한 번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에세이스트로서도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좋은 건 다시 한번 읽어보자. “우리가 세계를 산과 바다를 소유할 수 없듯 언어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적어두고픈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책의 미덕은 중반부에 가면 새롭게 드러난다. 영어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만 그치지 않고, 공부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팁까지 알려준다. 단어, 문법, 말하기, 듣기, 쓰기까지 고루. 특히 앞으로 내가 영어를 공부한다고 얼마나 늘겠냐며 팔짱을 낀 성인 학습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다. 영어단어와 문법, 문장 구조에 담긴 인문학적 사유 역시 눈여겨보시길.


  이 책은 시종일관 “삶을 위한 영어공부(236쪽)”, “영어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영어공부(254쪽)”를 강조한다. 당장 시험을 보고 결과를 내야 하는 학생들, 그들을 지켜보는 학부모에게는 어쩌면 한가한 소리로 치부될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돌아가더라도 바른길이 지름길인 것을. 영어를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을 점검하고, 다정하게 관계를 맺으며, 언어에 담긴 의미와 나아가서 문화와 삶을 살아가는 태도까지 배울 수 있는 이 책을 모든 학습자에게 추천한다.      



* 이 글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기자단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https://m.blog.naver.com/noworry21/223060037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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