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홍은전, 그냥 사람, 봄날의 책
후회했다. 내가 왜 이 책을 함께 읽자고 골랐던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기자단 첫 모임을 앞두고 각자 인생책을 골라달라는 주문에 마침 눈에 들어온 게 이 책이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읽는데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데도 도무지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여지없이 울다가, 접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했다. 읽기도 쉽지 않은데 쓰는 사람은 오죽했을까 싶다가, 책에 나온 현실을 매일 사는 사람들도 있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사람』은 인권·동물권 기록 활동가인 홍은전 작가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아 펴낸 책이다. 저자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13년을 교사로 일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났다. 그것은 “경쟁하는 세계에서 연대하는 세계로, 적응하는 세계에서 저항하는 세계로, 냉소와 냉담보다는 희망을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공동체로의 이동(247쪽)”이었다. 그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심신이 지쳤을 때 ‘이곳에선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노들에 들어왔고, “장애인도 버스 타자!”라는 시위 구호 앞에서 “그럼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되지 않나요?” 물었다. 처음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모른다고 타박하지 않고 자기가 본 바를 자세하게 일러준다.
그러나 그들은 십 수년간 장애인들이 시종 저항해 온 것이 바로 이 사회의 야만적 질주이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그 순간에도 자신들의 목숨이 이 고라니 같은 존재들에 의해 얼마간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44쪽)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병든 노인들을 버려서가 아닌가.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다. (79쪽)
홍은전은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병든 노인들, 사회적 약자들을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고 보는 시혜적 관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경쟁과 속도와 돈으로 질주하는 이유는 이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고라니와 브레이크가 사라진 세상이라면 곧 내 세상도 깨어지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미국 장애 운동의 대모 주디스 휴먼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누구나 비슷한 일이 닥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해 줄 수 있는 게 ‘문명’이고 ‘시민의식’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기에 우리는 모두 ‘내일의 장애인’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나의 안녕과도 뗄 수 없는 문제가 된다.
『그냥, 사람』은 인권, 동물권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만 글쓰기에 관해서도 많은 통찰을 담고 있다. 그에게 “글쓰기는 사랑했던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노력(16쪽)’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 여정을 시작했기에 “글쓰기는 언제나 두려운 일이지만 내가 쓴 글이 나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에 계속 쓸 수 있었다.(25쪽)”라는 고백이 와닿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글이 누구를 향해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고 동시에 진정한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을 보면 시큰시큰 아파오는 자리. 나의 동그란 빈자리(145쪽)”는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이 책을 한줄평으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얄팍한 내 세계가 부끄러워지는 책?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 분명한 건 읽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기어코 안정된 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는 카프카의 말은 옳다. 이 책은 조금이라도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그저 소시민적인 삶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내면의 얼음을 사정없이 부순다. 그리고 집요하게 묻는다. “네 몫의 싸움(171쪽)”은 무엇이냐고. 쉽게 답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다만 변화의 첫걸음으로 ‘인권재단 사람’에 정기후원을 시작했다. 출금 알람이 뜰 때마다 이 책이 생각날 테고, 또다시 부끄러워지겠지만.
다시 4월, 4.3이 지나갔고 곧 세월호 9주기를 맞는다. 4.16이 지나면 바로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 다가온다. 우리 사회가 마주한 거대한 슬픔 앞에서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댓글 대신, 장애인 이동권 시위 기사 하단에 무시무시한 악플 대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둘 동심원이 되어 퍼져나가는 것을 상상해 본다. 함께 살자며 서로의 곁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함께 읽을 책으로 골랐나 보다. 다시 맞은 아름다운 계절이 부끄럽고 아린 이들에게 이 노란 리본 같은 책을 권한다.
* 본 글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블로그 일간노워리에도 게시되었습니다. https://m.blog.naver.com/noworry21/223070716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