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정혜신, <당신이 옳다>, 해냄출판사
아마 내 최초의 기억일 것이다.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닐곱 살쯤 되었던 것 같다. 생일을 앞두고 뭘 받고 싶냐는 엄마의 말에 내가 답했다. “선물 말고, 나랑 눈 맞추고 '정인아, 사랑해' 말해줘. 내 나이만큼.” 잔뜩 기대에 찬 얼굴이 무색하게 엄마는 화를 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왜 모르냐고. 그날 당황스럽고 무서웠던 마음이 여태 남아있다. 엄마는 왜, 엄마는 왜. 어린아이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이 태어난 뒤 나누어야 하는 사랑을 생일만큼은 독점하고 싶었을까? 넌 어쩜 그런 생각을 했냐고 칭찬받고 싶었을까? 동기가 무엇이든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사랑과 공감’이었던 것 같다.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를 읽었다. 2018년에 출간되었는데 그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무려 50만 부가 팔린 초대박 베스트셀러를 나까지 읽나 싶기도 했고, 전직 사회과학도로서 심리학 서적에 가지고 있었던 편견,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비판이 내재해 있었다. 무엇보다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세상사에는 옳고 그름이 분명히 존재하고 판별기준이 있을 텐데 당신이 옳다니?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없는 얘기 아닌가? 그럼 사이코패스도 옳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너무 낙관적인 견해가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서로 다른 주장에 허허 웃으며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다 하는 황희 정승 같은 제목이군, 생각하며 책을 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히 오해였다. ‘당신이 옳다’는 말은 당신이 한 행동이 항상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느끼는 바는 옳다’라는 뜻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충고·조언·평가·판단(이하 충조평판) 하지 않고 힘써 당신 편에 서 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30년 이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하며 1만 2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은 그는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필요로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붙들었다.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이 죽을 만큼 힘든 한 사람을 살리는 심리적 심폐소생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저자는 안전한 진료실을 박차고 나와 거리의 의사, 국가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의 치유자로 살면서 깨달은 한 가지를 독자와 아낌없이 나눈다. 전문가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누구나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집밥 같은 치유, 바로 공감이다.
주위에 보면 특별히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우는 사람만 봐도 따라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사람, 별말을 보태지 않아도 따스한 눈빛만으로도 위로를 주는 사람. 솔직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데 익숙하고, 마음을 이해해 주기보다 해결책(이길 바라지만 아마 충조평판이었을 것이다)을 제시하는데 능한 편이다. 그런 내게 저자가 제시한 공감이라는 처방이 처음엔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혜신은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127쪽)”고 말한다. 공감은 감정노동과 구분되고,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질문을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니 희망이 생긴다. 저자는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129쪽)”이라 단언한다. 누구나 배우고 익히면 할 수 있다니 격려가 된다.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여섯 살 아이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게 끝이 아니구나.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는 거구나.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익힌다. 그 힘으로 삶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이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해냄출판사, 311쪽)
언젠가 신형철 평론가가 책의 서문에서 편집자에게 감사를 표하며 “삶의 어느 법정에서건 나는 그녀를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고 쓴 헌사가 너무 멋있어서 맘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 이런 근사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라는 말은 얼마나 든든한지! 특히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한 가지가 이것이면 좋겠다. 그래서 가지는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뿌리는 땅 속 깊이 내린 나무처럼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이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국·영·수와 비교도 되지 않게 중요한 배움이 여기에 있다.
해마다 생일이 돌아오면 어릴 적 선물 대신 사랑한단 말을 듣고 싶었던 어린 내가 생각이 난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지. 뭐 어려운 일이라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 맞추고 사랑한다고 해줬으면 달콤함만 남기고 기억 저편으로 잊었을 일을 지금껏 곱씹게 했을까 원망스럽기도 하다. 동시에 사십 대에 접어든 나는 당시 엄마가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는 걸 떠올린다. 우리 또래의 많은 부모님이 그렇듯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에, 두 아이 육아에, 밀려드는 사회의 압력에 어깨에 진 짐이 무거웠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걸 왜 모르냐는 말엔 두려움과 서운함이 함께 배어있다. 다정한 눈 맞춤도, 따뜻한 포옹과 사랑의 속삭임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데 엄마의 삶에 혹 그게 부족했던 게 아닐까. 공감의 첫걸음은 질문이라는데 언젠가는 조심스럽게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때 엄마 마음이 어땠냐고. 오래 품은 질문에 답을 들을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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