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베란다 장미 일지
4/14. (금)
이번 봄글방 주제는 봄꽃 관찰이다. 우리 집 유일한 화초 호주매화가 말라죽은 뒤 삭막해진 베란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둘째와 집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집 앞 꽃가게에서 발걸음이 느려졌다. 빨강 분홍 하양 다채로운 색깔의 제라늄, 보랏빛 종 모양 캄파눌라, 노랑 존재감을 뽐내는 수선화, 키는 작지만 화려한 팬지... 시선을 사로잡는 봄꽃들이 햇빛 샤워 중이었다. 어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선우가 하는 말 “엄마, 고양시 꽃이 장미래요. 장미로 사요.” 고양시 시화(市花)가 장미라는 걸 아이 덕에 알게 되었다. 작년에 영국에서 돌아온 뒤 어눌한 한국어로 학교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그래도 뭔가를 배우고 있구나 싶어 안심됐다.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준 아이가 새삼 기특하고. 선우가 마음에 들어 한 분홍 장미, 내 눈에 든 노랑 장미 화분 두 개를 사이좋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4/15 (토)
아무래도 좁은 플라스틱 화분에 갇힌 장미가 갑갑해 보여 생애 첫 분갈이를 시도했다. 우선 다2소에서 분갈이 상토와 영양제를 사 왔다. 빈 화분 두 개를 꺼내 배수용 작은 돌멩이를 맨 아래 깔았다. 어제 꽃집 사장님의 조언대로 임시 화분에서 살살 뽑아낸 장미를 화분에 담고 주위 남는 부분에 상토를 채웠다. 흠뻑 물을 주고 주사기 모양 영양제도 쑥 꽂아주니 분갈이 완성! 임시방편 좁은 집이 안쓰러웠는데 제대로 거처를 마련해 주니 보기도 좋고 마음도 뿌듯하다. 새집에서 쑥쑥 잘 자라렴.
4/16 (일)
오늘은 번외 편. 장미 친구 바질의 소식이다. 지난주 부활절에 교회에서 심은 바질씨의 싹이 올라왔다. 쌀알 반 크기의 초록 새싹이 어찌나 귀여운지 연신 감탄했다. 둘째가 방울토마토를 키워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 다2소에 들러 토마토 재배 키트를 샀다. 화분에 씨, 흙까지 세트로 구성되어 있어 밀키트처럼 편리하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선우가 씨를 심고 직접 지은 “방울이”라는 이름의 작은 나무 팻말도 꽂았다. 이제 베란다 화분도 우리 가족처럼 네 식구가 되었다. 일렬로 세워놓으니 오종종하니 귀엽다.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초보 식집사의 마음.
4/17 (월)
아침에 일어나면 꼭 베란다 블라인드를 걷어 바깥 날씨를 확인한다. 이제 하나의 과정이 추가되었다. 바로 베란다 화분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것. 어제만 해도 봉오리였던 노랑 장미가 활짝 피었다. 살짝 오렌지빛과 노란빛이 섞인 겹꽃인데 다홍색 테두리가 있어서 망고 튤립처럼 오묘하게 아름답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전하니 선우가 무척 반가워한다.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4/18 (화)
마감인 원고를 쓰느라 종일 바빴다. 장미의 안부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4/19 (수)
매일 아침 베란다 식물들을 들여다보며 안부를 나눈다. “안녕, 잘 잤니?” 인사도 건넨다. 겉흙을 만져보니 보송보송 말라 있길래 싱크대로 데려가 물을 듬뿍 주었다. 물을 줄 땐 흠뻑 젖도록 듬뿍 줄 것. 잎은 젖어도 되지만 꽃잎이 상할 수 있으니 꽃엔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해야 한단다. 세심하게 돌본다는 것은 물을 줄 때와 아닐 때를 아는 것. 물이 닿아도 되는 곳과 아닌 곳을 구분하는 것.
4/20 (목)
일찍 잠에서 깬 아이들에게 물었다. “장미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 기분 좋다는 선우의 말에 이어 형 선율이가 “평화?”라고 답했다. 장미와 평화를 연결해 본 적이 없는데 대답이 신선해서 이유를 물었다. “장미를 키우면서 엄마가 아침에 화를 덜 내잖아. 정서적 안정감! 화초는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실과 시간에 배웠어.”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장미가 온 뒤로 아침을 더 기분 좋게 시작하는 것 같다. 엄마의 기분이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으로 이어지나 보다. 사춘기에 엄마들이 그렇게 식물을 키운다는데. 조용하고 말대꾸 안 하고 정성을 쏟으면 쏟은 만큼 잘 자라는 모습에 그렇게 위로받는다나. 나도 애들 사춘기 되면 괜히 퍼붓지 말고 화분을 하나씩 들여야지.
4/21 (금)
오늘도 꽃모닝! 장미를 좋아지니 자꾸 검색창에 장미에 대해 찾아보게 된다. 오늘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장미는 통풍이 아주 중요한 식물이라 가능한 한 자주 바람을 쐬게 해줘야 한다. 통풍에 방해되는 아래쪽 잎과 가지는 수시로 잘라 주어야 한다는 것도. 사실 식물을 키울 때 물과 빛은 신경 쓰지만 바람은 간과하기가 쉬운데 의외로 중요한 요소가 바람이란다. 사람도 그렇지. 바람이 중요하지. 숨 막히는 관계만큼 도망가고 싶은 관계도 없으니까. 아이들의 시간에도 슬슬 바람이 지나가도록 둬야지. 숨 쉴 여유를 빼앗지 말아야지. 이상적인 관계는 통풍이 되는 관계가 아닐까. 그런 사람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분다.
4/22 (토)
분홍장미는 하나가 시들어 가고, 다른 하나는 개화 중, 벌써 세 번째 꽃대가 올라온다. 노랑 장미는 하나는 완전 개화, 두 번째 봉오리에서 또 꽃 필 준비를 하고 있다. 장미 아래쪽 잎을 손으로 떼어주다가 그만 가시에 찔렸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가시가 있다는 걸 관념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 찔려 느껴지는 생생한 아픔은 다르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다 안다고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살지 말아야지. 타인의 아픔에 대해 쉽게 말하지 말아야지. 어느 순간에도 무감해지지 않고 싶다.
4/23 (일)
어제부터 장미 잎에 하얀 곰팡이 가루 같은 게 보여서 찾아보니 흰 가루병이라고 한다. 통풍이 잘 안 되고 습할 때 생기고, 실내 베란다에서 장미를 키울 때 흔한 병이란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 종일 문을 닫아놓아서 그랬나? 역시 장미는 마당 있는 집에서 마음껏 햇볕 쐬고 바람을 맞으면서 키워야 하는 건가? 애초에 베란다에서 키우기 어려운 식물을 뭣도 모르고 들인 건가? 찾아보니 장미는 병충해도 잘 생기고, 일조량도 풍부해야 해서 키우기에 난이도가 있는 식물이란다. 역시 뭘 모르고 데려왔구나. 하지만 모르기에 용감했던 거지! 흰 곰팡이 퇴치에 효과가 있다는 마요네즈 물 희석액으로 천연살충제로 잎을 하나씩 닦아주었다. 잎마다 뒤덮인 뿌연 가루는 사라지고 반질반질 광택이 난다. 부디 좋아지길.
4/24 (월)
어제가 마감일이지만 과제 제출을 못 했으므로 오늘은 보너스 일지다. 장미는 색마다 꽃말이 다르지만 미니 장미의 꽃말은 ‘끝없는 사랑’이란다. 잘 키우면 봄부터 초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고 진다고 해서 끝없는 사랑인 건가? 분명 끝은 있겠지만 지금의 사랑임은 틀림없다. “너의 장미꽃이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라는 어린 왕자의 말대로 매일 공들여 돌보고 있으니.
원래 성취 지향적이었던 나는 대학 때까지 30분 단위로 쪼개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편하던 사람이었다. 피고 지는 꽃이나, 오고 가는 계절보다 다른 유용한 것을 좇느라 잰걸음을 옮기던 사람이었는데 엄마가 되고 글을 쓰면서 변했다. 특히 이번 봄은 글을 쓰기 위해 서툰 솜씨로 봄나물도 해 먹고 봄꽃 화분도 들이다니! 달라진 내가 신기해 자꾸 웃음이 난다. 새로운 세계로 초대받는 느낌이다.
오늘은 햇볕도 좋고 미세먼지 수치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창문을 오래 열어두었다. 지난 금요일 큰아이가 방과 후 과학 수업에서 심어온 딸기 모종까지 다섯 개의 화분이 나란히 햇빛을 보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 줘서 고마워. 우리 같이 잘 자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