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과 성장의 기쁨을 누리는 봄
지난해 봄은 모든 게 불안정했다.
작년 1월 귀국 후 영국에서 보낸 짐이 도착할 때까지 석 달 동안 강제 ‘미니멀 라이프’로 지냈다. 짐이 온 뒤로는 정리하는데 추가로 한 달이 꼬박 걸렸다. 3월 개학 후엔 아이들 학교 적응이 급선무였다. 새로운 환경과 친구들, 선생님, 무엇보다 한국어를 홀랑 까먹어 버린 녀석들은 외국인처럼 낯선 학교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둘째는 아예 교과서를 전부 영어로 변환한 태블릿 PC에 의지해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좋은 게 하나 있어! 영국보다 급식이 맛있어!” 학교 안 간다는 말은 않고 해맑게 웃는 모습이 그저 고마워서 그래, 뭐라도 좋은 게 있으면 됐다며 따라 웃었다.
5월, 생활은 점점 안정이 되어가는 데 내 마음은 여전히 덜컹거렸다. 왜 이렇게 외롭지. 영국에서는 마음을 터놓고 지낼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 나라에 온 뒤 만날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 아는 사람들은 떠났거나 멀어졌고, 변함없이 오랜 친구들은 왜 다 멀리 사는 건지. 혼자 집, 도서관, 마트를 세 꼭짓점으로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했다. 점점 우울해지는 나를 보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SOS를 쳤다. 애들을 재우고 나면 남편과 매일 밤 50분씩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오늘 있었던 소소한 일상을 나눴다. 식탁에서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면 자주 심각해지고 울컥하는데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깊지만 가벼웠다. 중요한 얘기는 이 시간에 하려고 아껴둘 정도였다. 가장 가까운 친구와 함께한 밤 산책 덕분에 한 시절을 버텼다.
귀국 후 1년이 지나고 2023년 봄을 맞았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이 잘 지내주었다. 여전히 영국 학교와 친구들을 그리워하지만 새 친구들을 사귀고 한국말도 많이 늘었다. 가끔 “엄마 나 양말 뭐 입어(wear)?” “나 축구 놀아도(play) 돼? 같은 어색한 문장을 구사하나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다. 코로나로 인한 단축수업도 모두 정상화되고, 방과 후와 학원 안배를 잘해둔 덕분에 나도 제법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좋은 건 마음이 잘 맞는 동네 친구가 생겼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과 같은 반 친구들 가정인데 아이들끼리 잘 어울리니 금세 엄마·아빠들도 친해졌다. 급할 때 서로 아이들을 봐주기도 하고, 늦은 밤 와인 한 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로도 발전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생기니 사는 곳에 더 마음을 붙이게 됐다.
“이제 뭐 할 거야?”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작아졌던 나는 무수한 고민과 좌절 끝에 올해 2월 독립서적을 출간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책을 냈나 여전히 부끄럽긴 하지만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는 내가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한번 매듭을 짓고 나니 더 이상 뒤를 돌아보거나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언정 스스로를 읽고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기 시작했다. 읽고 쓰기는 이제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영국 얘기가 끝나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막막했기에 올봄 눈앞에 펼쳐진 글쓰기 모임 3개를 붙잡았다. 그 덕에 두 달간 열 편의 글을 썼다. 6월이 끝날 때쯤엔 6편의 계절 산문과 9편의 서평을 완성할 것이다. (미래의 나여, 부탁한다!) 작년의 나는 2주에 한 편도 겨우 쓰는 사람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편씩 꾸준히 썼고, 두 편씩 쓴 주도 있었다. 대학원 3학점 과목을 3개 듣는 것처럼 정신이 없지만 확실히 글쓰기가 체화되는 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성장뿐 아니라 나의 성장을 목도하는 게 기쁘다. 이 나이에도 성장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꾸준히 글을 쓰면서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생겼다. 글쓰기의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을 함께 나눌 동료. 글쓰기를 통해 만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들이라 좋다. 겉돌거나 소진되는 주제가 아니라 껍데기 없이 자신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이들이라 편안하다. 만날수록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 생각만 해도 마음에 온기가 돈다. 글쓰기 모임이 주는 최고의 유익이다.
열심히 읽고 쓰고는 있지만 무엇이 될지 모르겠다. 무명의 작가, 아니 작가 지망생으로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 준엄한 생계노동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 자기만족에 불과한 건가 싶으면 움츠러들기도 한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해질 때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넓어지는 원>을 떠올린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넓어지는 원>
그저 하루하루 성실히 읽고 최선을 다해 쓰는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 글은 쓰면 쓸수록, 고치면 고칠수록 나아지는 거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는 만큼만 내 속도대로 쓰면 되니까 마음이 놓인다. 마음껏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3 요소가 일, 사랑, 친구라는데, 소중한 이들이 곁에 있고 잘하고 싶은 일이 있다. 2023년 봄, 내겐 더없이 충만한 계절이다.
#미루글방 #봄글방 과제로 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