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계절산문

세상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어

여름 소리 채집 일기

by 시에나


여름 소리를 찾아서


1. 자연의 소리

새소리 (양재천): 삐우 삐우 삐빅 삐이이익 깍깍깍. 여러 번 들어봤지만 언어로 옮기기가 어렵다. 새소리를 들으니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통념에 물음표가 생긴다. 분명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듯한데. 새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어떤 새가 내는 소리인지 알고 싶다.


계곡 물소리 (서오릉): 싸아아아아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물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달리 낙차에서 나오는 소리. 소나기가 연상되는 소리. 시원하지만 다소 시끄럽다.


파도 소리(왕산해수욕장): 철썩 보다는 쏴아 쏴에 가깝다. 낮보다 밤바다 파도가 좀 더 세고 거친 느낌이다. 근심걱정일랑 쓸려 들어가고 희망과 위안은 밀려 나오길.


소리 채집 과제 덕분에 숲길, 해변, 하천 산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봄나물 과제 때문에 서투른 요리를 하고, 봄꽃 관찰 일기를 쓰느라 장미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처럼 글방과제는 매번 새로운 도전이다. 내 안에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준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로 힐링. 실제로 스트레스를 경감시키고, 기억력을 상승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도시의 소음을 피해 더 자주 자연으로 가자. 자연에서 생생한 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좋지만 여건이 안 되면 미리 녹음해 둔 파일이라도 듣자. 소리(음악)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다. 그 시절 그 공간으로 즉시 우리를 데려가 답답한 도시공간에서도 일시적으로 환기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다정한 이들과 자연의 소리 녹음파일을 주고받자. “네가 생각나서 이 소리를 보내.” 돈 안 들이고도 마음을 전하는 선물이 된다.



2. 사람이 만든 소리


폭죽 소리 불꽃놀이 소리 (을왕리): 타다다닥 펑펑 끼이익. 영상과 함께 들을 때 즐거움이 배가된다. 신경을 거스르는 자동차 경적과 달리 신남이 묻어있다. 축제의 소리. 인생이 매일 축제 같을 수는 없지만 가끔은 그런 순간을 살고 싶어서 폭죽을 퍼뜨리고 불꽃을 쏘아 올리는 게 아닐까. 찰나의 아름다움만 남기고 허공에 사라지더라도. 다 같이 와- 감탄하는 순간. 우리가 함께 명멸하는 불꽃을 바라보던 순간.


화장실 청소 솔질 소리 (집): 하루 종일 대청소하고 기운 빠진 공휴일 밤, 시키지도 않았는데 들어가 화장실 청소를 하는 남편. 쓱싹쓱싹 문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어찌나 힘찬지 얼른 핸드폰을 찾아 녹음했다. 쓱싹쓱싹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달콤하고 생생한 소리. 어릴 땐 이해 못 했던 중년부부의 사랑. 고맙고 애틋한 소리.


화이트 와인 따르는 소리 (집): 뽁! 코르크 마개를 열고 와인잔에 차갑게 보관해 둔 와인을 졸졸졸 따르는 소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 소리. 시원함+청량함=누구도 부럽지 않은 순간. 여유와 행복이 넘치는 주말 저녁의 소리.



3. 소리 채집 미션을 모두 완료하고 느낀 점


소리 채집 미션은 처음이라 새로웠다.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녹음하면서 ‘세상이 소리로 이루어져 있구나’ 새삼 느꼈다. 우리 몸의 기관 중에 청각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각이라는데 그동안 너무 시각에만 의존하고 살았다는 반성도 든다. 때로는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이 있고, 하나의 감각을 닫을 때 다른 감각이 더 세밀하게 열리는 법. 자주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 봐야지. 일종의 소리명상이 될 수 있겠다.


그간 나는 소리가 소음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들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물으면 여지없이 소음이라고 대답한다. 에너지 넘치는 남자아이 둘과 함께 있으면 스마트 워치 건강 앱에서 메시지가 자주 뜨곤 했다.


“소음이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청력 손실이 우려됩니다.”


끝없는 질문,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 오디오북, 심장 박동까지 빨라지는 음악, 형제들끼리 다툰 뒤 고성, 눈물과 고자질, 항변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있을 때는 음악조차 틀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미술관을 찾았다. 그림은 잘 모르지만 발소리 말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사뿐사뿐 걷는 곳이라 좋았다. 하염없이 오래 머물러도 되는 곳,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 무엇보다 조용한 곳.


이번에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파도 소리에 섞여 들어간 아이들의 음성을 듣다가(“이제 갑시다! 아빠 다시 업어주세요.”) 이 또한 여름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은 아직 여름이구나.


인생을 100세라고 친다면 대략 25살까지는 봄인 것 같다. 설렘과 성장으로 대표되는 시기. 변화무쌍하니 변덕과 불안도 태생적으로 존재한다. 봄바람이 분 뒤 찾아오는 꽃샘추위가 가장 추운 법. 그러나 어김없이 봄은 온다. 화려한 꽃망울이 터지고, 나무에는 푸른 기운이 올라온다. 일 년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25세부터 50세까지는 여름이 아닐까. 장마를 지나고 나면 뙤약볕을 견디는 시기가 찾아온다. (내 30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일 년 중에 가장 긴 휴식인 여름휴가도 있고, 여름은 그 자체로 젊음이자 축제. 나는 지금 한여름은 살짝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늦여름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고생스러운 시기가 지나고 뜨거웠던 여름이 살짝 그리워지기도 하는. 요즘 그렇게 애들 어릴 때 사진을 들여다본다.


50세부터 75세는 가을이라 할 수 있겠다. 청명한 가을 하늘, 맑고 상쾌한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 가을 단풍은 봄꽃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답다. 가을은 땀 흘려 뿌려놓은 열매를 거둬들이는 시기다. 추수의 기쁨과 수고한 보람을 맛본다. 그러나 태풍이 오거나 비가 많이 오면 봄여름 수고가 다 무로 돌아갈 수도 있다. 조심도 해야 하지만 운도 필요한 시기.


75세가 넘으면 인생의 겨울이 아닐까. 겨울은 서글픔일 수 있지만 또 축복일 수도 있다. 파커 팔머의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으면서 노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노화는 생의 저주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아낸 자에게만 찾아온 축복일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않으므로.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육신은 쇠약해지고 앙상해지나 겨울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겨울을 대표하는 건 역시 눈이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눈처럼 남은 자리가 깨끗하기를. 크리스마스 같이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따뜻한 순간도 있기를.


내 인생은 아직 여름. 아이들이 헤드폰을 쓰기 시작하면 사춘기가 시작된다는데 예상컨대 약 1-2년 남은 것 같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영원하지 않다니 갑자기 아쉽기도 하다. 그땐 다른 소리에 귀 기울여봐야지. 도시의 소음보다 자연의 소리,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신음도 외면하지 않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요를 즐기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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