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김상근 그림책, <두더지의 여름>, 사계절출판사
맑고 더운 바람이 부는 6월 아침, 오늘은 여름 그림책을 빌리러 집 근처 도서관에 가는 날이다. 도보로 20분쯤 걸리는 도서관 가는 길은 내가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산책로. 여름이면 쭉 뻗은 자전거길 양옆으로 키 큰 나무들이 선사하는 초록그늘을 만날 수 있다. 서라운드로 들리는 새소리의 향연을 배경음악 삼아 걸으니 어느새 도착!
어린이 자료실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다. 시원하고 조용한 열람실을 독차지하다니 왠지 횡재한 기분이다. 열람실 컴퓨터에 ‘여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니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목록들. 서가를 돌면서 수집한 여름 그림책 열세 권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하나씩 펼쳐 읽어 내려가는데 어느새 마음 연못 위로 동그란 물결이 하나둘 퍼진다. “나는 언제나 천국을 일종의 도서관으로 상상해 왔다(I have always imagined Paradise as a kind of library).”는 보르헤스의 말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열세 권 중에 특별히 마음을 두드리는 네 권을 추렸다.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주제와 매력이 도드라져 어느 책으로 리뷰를 쓸까 고민됐다. 이럴 땐 그림책의 주인인 아이들에게 물어봐야지. 리뷰까지 다 쓰고 집에 가던 마음을 접고 네 권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과가 모두 끝난 밤,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보통은 밤마다 아빠가 위인전·한국사 전집류를 순서대로 읽어주는데 오늘은 특별히 오랜만에 엄마랑 그림책 데이트다. 글방 선생님께 배운 대로 아이들에게 “네 권 중에 가장 좋았던 한 권을 골라주면 그 책으로 엄마가 글을 쓸 거야! 너희들 도움이 필요해.” 했더니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틀에 걸쳐 두 권씩 네 권을 읽었다. 그중 아이들에게 최종 선택을 받은 책은 바로 김상근 작가의 <두더지의 여름>! 전작 <두더지의 고민>, <두더지의 소원>을 좋아했던 터라 다시 만난 두더지 시리즈가 반갑단다.
땅파기를 좋아하지 않는 주인공 두더지는 어느 날 숲에서 길을 잃은 거북이를 만난다. 말 없는 거북이를 바다에 데려다 주려다 둘은 예기치 않은 모험을 시작한다. 땅속을 깊이 파다가 파도 소리, 바다 냄새에 이끌려 나가 보면 죄다 엉뚱한 장소들(이 대목에서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두더지와 거북이는 바다에 도착한다. 둘이 나란히 앉아 말없이 수평선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는 장면이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기분 좋은 반전이 지나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둘째가 속삭이듯 말했다.
“감동받았어요. 울 뻔했어요.”
안 그래도 녀석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슬쩍 보고 적잖이 놀랐던 참이었다. 타국에서, 돌아온 내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외로움이 떠오른 걸까. 힘든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두더지도, 우리 선율 선우도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아서 기쁘다. 언젠가 함께 푸른 바다를, 그 위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볼 날도 있겠지.
아이들은 활자에 집중하는 나보다 그림 디테일을 더 잘 찾아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중년 부인이 엄마인지 할머니인지 헷갈리는 나에게 전작에 나왔던 그 할머니임을 알려주었다. 두더지가 먹고 있던 옥수수 역시 <두더지의 고민>에서 멧돼지가 먹고 있던 것과 같단다. 확인해 보니 과연 그 할머니와 그 옥수수가 맞았다. 작가가 숨겨둔 그림 속 비밀 열쇠를 찾아내는 건 역시 아이들이구나 싶었다.
어릴 때야 열심히 읽어줬지만 학습만화로 넘어간 뒤에 그림책을 읽는 시기는 지났다고 여겼다. 이토록 푹 빠져들 줄은 몰랐지. 앞으로 좋은 그림책을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초대해서 함께 읽어야겠다. 초여름 그림책 리뷰 과제 덕분에 아이들도 나도 다시 그림책의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다.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새로운 계절을 맞을 때마다 새롭게 만날 그림책이 기대된다. 역시 천국의 원형은 도서관일지도 몰라. 내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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