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세 안정인이 51세 안정인에게 쓰는 편지*
정인아 안녕? 내가 나에게 편지 쓸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쑥스러운지 몰라. 실은 이번 주 여름 글방 주제가 ‘내 인생의 열매’야. 열매, 열매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에게 열매라 부를만한 게 있나 싶더라고.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육아와 글쓰기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어. 아직 꽃봉오리인 우리 아이들이 열매를 맺긴 한참 남은 것 같고, 글쓰기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매를 논할 시기는 아니니 말이야. 그럼 혹시 10년 뒤에는 열매라고 부를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기로 했어.
인생을 사계절로 본다면 늦여름 혹은 초가을쯤을 통과하고 있지 않을까? 둥둥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들떠있던 신혼이 지나고 어린아이 둘을 낳아 키우는 10년 동안 참 힘들었지. 한여름 뙤약볕 같았어. 기쁜 순간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견뎌야 하는 시기였던 것 같아. 문득 서른 살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나네. 앞으로 시작되는 삼십 대에는 냉담했던 이십 대처럼 살지 않게 해달라고, 열정을 다해서 주어진 삶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했었지. 삼십 대 중반이었던 어느 날, 그때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어. 아이들을 키운다는 건 도무지 냉담할 수 없는 거니까. 나에게 꼭 맞춤한 사랑과 인내의 학교에 들어오게 된 거니까.
삼십 대 중후반엔 시어머님 암 투병과 장례를 치렀고,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망하기도 했고, 예상치 않은 해외 생활까지... 정신없이 살아왔네. 그래서일까. 고단했던 시간이 지나고 맞은 40대가 참 좋아. 아이들이 커서 이제는 손이 덜 가고, 양가 어른들도 아픈 데 없으시고, 남편과 나도 아직 젊고 건강하니 큰 걱정 없이 마음이 놓여. 아이들 때문에 늘 뒤로 미뤘던 내 일,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글쓰기에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 낮이고 밤이고 푹푹 찌던 날들이 지나고 이제는 내 삶에도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 것 같아. 이 시간이 얼마나 허락될지 모르지만 최대한 지금을 누려보려고 해.
50대에 들어선 안정인은 어때?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고 살고 있니? 그때쯤엔 지금 초등학생인 큰아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거고, 둘째가 그 뒤를 따라가겠지? 폭풍 같던 사춘기가 끝나고 이젠 성인 자녀들과 새롭게 관계 맺기를 연습하고 있겠네. 여든이 넘으신 양가 부모님들이 편찮으시진 않은지 신경이 많이 쓰일 테고. 너랑 남편도 마냥 젊지만은 않은 나이가 되었을 거야. 오십견도 오고,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해서 오래 책 보는 것도 쉽지 않겠지. (쓰다 보니 점점 슬퍼지네. 지금부터 건강관리 잘하자!) 그리고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혹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닥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해. 어떤 순간에도 생을 소중하게 껴안고 살아갈 수 있는 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홀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글은 계속 쓰고 있니? 아니면 그보다 더 가슴 뛰는 일을 찾았니? 계속 쓰고 있다면 그사이 네 이름을 단 책도 몇 권 나왔을까? 작가라는 말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지 않는 네가 되었을까? 꼭 책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나는 네가 읽고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두 가지가 나 자신과 타인을, 나아가서 세상을 이해하는 귀한 도구라는 걸 이미 너는 알고 있잖아. 글을 쓰면서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도.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니? 책은 늘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주잖아. 읽고 쓰는 삶이 주는 선물을 놓치지 않길 바랄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땐 내가 맺고 싶은 열매들, 즉 아이들을 잘 키우고, 글쓰기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쓰다 보니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 전 읽은 그림책 『수박이 먹고 싶으면』이 떠오르네. 농부가 수박 한 덩이를 위해 들이는 수고가 얼마나 큰지. 햇볕과 비와 바람과 영양이 충분한지 자주 들여다보고, 땀과 정성을 쏟지만 때론 모른 척도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다림이더라. 어느 해엔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로 모든 걸 망칠지 몰라. 그럼에도 농부가 할 수 있는 건 혹은 해야 하는 건 좋은 열매를 바라고 묵묵히 수고를 감당하는 것. 살수록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 성과보다 중요한 건 태도라는 생각이 들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 기억나니? “수박을 먹고 싶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커다란 손짓으로 불러야 한다. 엊그제 다툰 사이도, 지나가는 길손도 이리 와요! 반가이 불러 정답게,정답게 둘러앉아야 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성별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도, 휠체어에 앉아 어린 딸을 안고 있는 엄마도 함께 모여 쩍! 잘 익은 수박을 나눠 먹는 부분 말이야. 한 해 꼬박 농사지은 결실을 내 배 불리는 데만 쓰지 않고,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모습이 감동이지. 처음 보는 이와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잔치에 초대하는 넉넉함이 참으로 존경스러워. 내 삶도, 나의 ‘돌봄과 작업’도 그런 나눔의 열매를 맺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인생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지. 이미 사회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고 너만의 속도로 뚜벅뚜벅 걸어가길. 마흔하나에 쓴 편지를 십 년 뒤 네가 조금은 귀엽고 조금은 대견한 마음으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행운을 소망하며 앞으로 펼쳐질 네 인생에 응원을 보내. 생이 보내는 여러 과제를 두려움 없이 맞이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보암직한 열매를 위해 애쓰기보다 너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사랑을 담아
정인
* 이화정(2019), 『함께 읽어 서로 빛나는 북 코디네이터』, 이비락, 28페이지. '40대의 내가 10년 후의 나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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