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에나 May 29. 2021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주는 힘

초보 엄마에게 글쓰기란



  초등학교 백일장부터 부담스러웠다. 누구는 술술 쓰는 것 같은데 나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턱 막혔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흩어 사라지는 말과 달리 기록되고 보존된다는 속성이 주는 부담감에 지레 피하곤 했다. 암기력과 성실성이 중요했던 학부과정을 지나 석사과정에 들어오면서 '공부는 곧 읽고 쓰기'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피할 길이 없었다. 특히 전공인 여성학은 텍스트와 나의 문제의식, 삶의 경험이 만나는 '쪽글'을 자주 써야 했다. 텍스트는 어려웠고, 겨우 이해했더라도 문제의식과 삶의 서사가 빈약했던 때라 글쓰기는 고행에 가까웠다. 마감시간 전까지 하릴없이 인터넷을 하다가 자정이 넘어 몽롱해질 때쯤 겨우 한 줄씩 뽑아내던 것이 생각난다. 한 그릇 마중물이 없었던 마른 우물 같은 글쓰기였다. 그래도 그 과정을 3년 동안 수행한 덕분에 삶의 어떤 부분을 포착하는 눈과 그것을 언어로 풀어내는 감각이 생겼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달라졌다. 글쓰기가 재미있어졌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뭔가를 적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뒤 24평 아파트에 갇혀 24시간 아이에게 매여 있는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유를 할 때 스마트폰을 곁눈질하거나 조금씩 책을 읽고, 아이 잘 때 재빠르게 집안일을 해치우는 일상. 사회와 단절되어 낮에 말 걸어주는 성인은 오직 택배 아저씨뿐이었다. 조용한 집에서 홀로 며칠 동안 같은 생각을 골똘히 하다, 미시적으로 보기 때문에 보이는 아주 사소한 것들과 혼자 웅얼거리던 생각을 페이스북에 풀어내었다. 친구들의 ‘좋아요’와 공감의 댓글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 보잘것없는 삶의 이야기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는다는 것이 기뻤다. 글쓰기는 원치 않게 집에 유배된 나에게는 유일하게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 어린이집에 다니며 나도 숨통이 좀 트이니 글쓰기는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던가. 글을 쓰지 않아도 살만해졌다. 그러다 다시 글쓰기와 가까워진 것은 둘째를 출산하고 난 뒤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첫째 아이는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네 살 한참 떼를 쓸 나이에 동생 스트레스가 더 해져 아이는 사소한 것에도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매일 지뢰밭을 넘는 기분이었다. 여기를 넘어가면 저기서 터졌다. 최악의 상황은 남편의 야근과 회식이 있는 날 밤에 벌어졌다. 아이의 떼를 받아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던 나는 이성을 잃고 아이에게 화를 퍼부었다.



  자신의 밑바닥을 볼 때, 절망감이 가득 찰 때, 가슴속에서 불이 올라올 때, 몸속에서 말이 차오를 때 글을 썼다. 아니 글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날 것 그대로의 아우성이었다. 주로 아이에게 무섭게 화를 낸 날의 반성문이거나, 이상은 높지만 생활에 발목 잡힌 한 여자가 울컥했던 순간의 기록이었다. 그렇게 몇 장을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나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만큼 한 것도 잘한 거야. 잘하고 있어, 정인. 그러니 힘을 내자. 그렇게 계절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일기장 한 권을 다 채웠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을 토해 내는 글쓰기를 하면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수 있었다. 내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정신실)’이었다. 그간 나는 느리지만 한 뼘 자랐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조금 컸고 둘째도 어린이집에 다닌다. 나는 남편의 부재에도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내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여전히 손발이 묶인 것 같다. 얼마 전에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을 읽다 서문에서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읽고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읽고 쓰기가 전부인 삶이라니. 문득 다리에 차고 있는 모래주머니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생활에서 시작된 글쓰기이니 생활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로서 내가 서 있는 풍경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내가 나로 살 수 있도록 붙드는 일,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주는 일, 새삼 글쓰기에 고맙다.  



(2017.3.31 은유 작가님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쓴 글을 옮겨둡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