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뵈울 수 있을까?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시골길을 가다가 한 허름한 집에 들른다. 놓쳐버린 점심 끼니를 묵밥으로 채우려
진흙으로 물든 마당에 차를 주차하고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뒷목덜미에 묻히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식당 안에 손님도 없고, 나를 반겨주는 직원이나 사장도 없이 눅눅한 공기만이 나를 반긴다.
그나마 눈에 띄는 나름 깨끗한 테이블에 앉아서 누군가 나에게 와서 주문받기를 기다렸다.
나이 지긋하진 할머니 한 분이 낮잠을 주무시다 깬 듯 때 묻은 앞치마를 두르면서 방에서 나오신다.
“혼자야?”
“네?”
“혼자 밥 처먹으러 왔냐고?”
“네?”
“넌, 인간성이 더럽니? 친구도 없이 혼자 밥 처먹으러 다니고……”
“네?”
“기다려.”
“주문 안 받으세요?”
“묵밥 집에 묵밥 처먹으러 온 거 아냐?
짜장면 처먹으려면 짜장면 집에 가고, 스테이크 처먹으려면 레스토랑에 가고……”
그리고는 주방으로 들어가신다.
김치를 더 달라고 하면 “네가 갖다 처먹어. 넌 손모가지 없어?”
“얼마예요?”라고 하면 “돈 많으면 많이 내고, 없으면 다음에 와서 더 내."
한국에서 욕쟁이 할머니 맛집에서 흔히 벌어지는 대화 내용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내가 전에 방문했던 샤토 시몽( Château Simon)이 바로 프랑스 판 욕쟁이 할머니 와이너리 같았다. 물론 할머니는 필자에게 무례하거나 욕을 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샤토 시몽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샤토 시몽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작은 시골 포도밭길을 찾아 헤매고 헤맸다. 처음에는 헤매는 시골길도 아름답고 정감이 가더니 계속 포도밭 사이를 뺑뺑이를 도니깐 점점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편에 전원일기를 보면 농촌 아저씨, 아줌마들 몇 명이 무리 지어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시골 냄새가 물씬 나는 풍광이었다. 나는 그 농촌 아저씨, 아줌마들이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는 샤토 시몽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한 아저씨가 웃으면서 "사이먼 엔 가펑클?" 하는 것이었다.
시몽은 사이몬의 불어식 발음이다. 굉장히 농촌틱한 농담이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순수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 농담을 한 아저씨보다 더 크게 웃으면서 "네,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자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하면서 열심히 샤토의 위치를 알려 주셨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농촌 개그맨 분이 알려준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찾고 있던 ‘Château Simon’이라는 조그만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샤또로 들어가는 입구는 나름대로 조경을 잘해놓았다.
부티크 같아 보이는 곳 안으로 들어가니,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한 할 머지 한 분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전자계산기로 계산하고 계셨다. 곗돈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계산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내가 말을 걸면 혼동될까 싶어서, 잠시 기다렸다. 할머님 또한 내가 온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듯
느껴졌다. 어느 정도 계산이 끝나자, 할머니는 나에게 “뭔 일 이래?”라고 인사인 듯 인사가 아닌듯한
멘트를 던졌다.
“할머니, 와인 테이스팅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당연하지”라고 목에 힘을 주어
답변을 하시더니 힘겹게 의자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손님이 오면 습관처럼 오크통 숙성고에 바로
전깃불을 켜시는 것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기 스위치를 올리시더니 와인 오크통 저장고로 혼자 걸어가셨다. 그리고는 “오크통에 관심 있으면 알아서 보고, 사진 찍고 싶으면 사진 찍고, 와인 시음하고 싶으면
주저 말고 와서 시음하라는 아주 몸에 익숙한 행동과 말투였다.
다시 말하지만, 할머니의 그런 행동이 나에게 무례하거나 거북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단지, 내 생각으로는 연세 때문에 자작한 일들은 귀찮은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나는 오크통 숙성고 사진을 몇 장 카메라에 담고는 와인 테이스팅 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할머니는 와인 네 병을 꺼내시더니 “뭐 마실래?”라는 묻는 것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그냥 “네가 알아서 마셔”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맨 오른쪽에 있는 레드 와인을 가리키며
“이것부터 맛 좀 봐도 될까요?” 했더니 할머니는 나에게 와인 오프너를 건네주시며 “따”라고 외마디
를 던지시는 것이다. 그 외마디에 불쾌감을 느끼기보다는 속에서부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네, 할머니”
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와인 코르크를 열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나에게 와인 잔을 내밀며 “따라봐” 하고
하시는 것이다. 누가 여기서 일하고, 누가 방문한 상황인지 혼동되는 촌극이 연출됐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그런 행동은 전혀 밉지가 않았다. 할머니는 먼저 당신이 와인 맛을 시음하고는 나에게 “마셔” 하면 와인을 권하셨다. 할머니는 와인 시음에서 중요한 절차(?)인 호스트가 와인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다음 손님에게 와인을 권하는 매너를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와인 시음이 끝나자 할머니는 나에게 다시 와인 오프너를 건네주시면서 “또 따”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정겹고 마음 편안한 샤또는 프랑스에 많이 않을 것이다. 두 개의 와인 시음을 끝내고 할머니는 소테른 와인을 권하셨는데, 나는 사양했다. 내가 샤또 시몽을 방문했던 이유는 스위트 와인을 맛보로 간 것이 아니고, 레드 와인을 사러 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샤또 시몽이 위치해 있는 곳은 Barsac 이라고 하는 곳이다. 보르도에서는 40Km 남쪽에 위치해 있고
달착지근한 와인을 주로 생산하는 마을이다. 차로 10분 거리에 Barsac, Sauternes, Bommes, Fargues 그리고 Preignac 라고 하는 다섯 지역의 조합이 Sauternes Appellation 이라는 AOC를 병에 적을 수가 있다. 나에게 흥미가 있었던 것은 샤또 시몽에서 생산하는 스위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에 관심이 있었다. 샤토 시몽은 1814년부터 와인 역사를 가지고 있고, 가족 중심 단위의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샤토다. 그리고 바르삭 지역 이외에 그라브 지역에도 포도밭이 있기 때문에 그라브 아펠라씨옹의 레드 와인을 맛보기 위해서 필자는 샤토를 방문했던 것이었다.
조금 전 맛을 본 레드 와인을 구입하기 위해 “ 할머니 금방 마셨던 2007 산으로 두 병 주세요”라고 와인을 부탁했다.
할머님은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좀처럼 나오질 않으셨다.
조금의 시간이 흐로고, 모습을 드러내신 할머니는 “ 없어”였다. 그리고는 “ 다른 것 사려면 사고 아니면
그냥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좀 망설이자 또 한 병을 따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에게
“ 아뇨 괜찮아요, 그냥 이걸로 주세요”라고 하고는 2008년 와인을 사 가지고 왔다.
정말 재미있는 할머님이셨고 아마도 다른 와이너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귀중한 추억이었다.
샤또를 떠나며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라고 샤또를 떠났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난해 11월에 다시 샤토 시몽을 찾았다. 바뀐 것은 없었다. 들어가는 길 입구에 조경이며, 샤토의 페인트 색이며…… 옛날 생각이 났다.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실까? 아마도 몰라보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부티크 안으로 들어갔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전에 할머니가 계산기로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셨던 책상 뒤편에 있는 방 앞에 신발들의 방향이 동북, 남서, 북 북남 방향으로 어지럽게 늘어져 있으며 문 안쪽에서 어린애들 노는 웃는 소링에 어른 목소리가 섞여서 마치 설날 식구들이 모여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내가 예전에 할머니하고 와인 테이스팅을 했던 곳에서는 젊은 남자가 이미 온 다른 두 손님에게 와인을 열심히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나도 와인 한 잔 마시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젊은 남자는 나에게 “와인 테이스팅 하시게요?”라고 묻는
이었다. 나는 옛날 기분 되살려서 “레드 와인 한 잔 주세요.”라고 하자, 그 남자는 “스위트 와인이 아니고 레드 와인요?”라고 되묻는다. “네, 레드 와인 테이스팅” 하려고요 라고 대답했다.
레드 와인을 건네받으면서 나는 그 젊은 남자에게 “여기 할머니는 어디 가셨어요?”라고 물으려다 아차 싶어서 묻지 않았다. 나는 다시 신발이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갔다. 나의 눈에는 할머님들이 신을 것 같은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목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는 잠시 외출하셨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