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30대의 지금의 내가 좋으니까
흔히들 29살이 되면 앞자리가 바뀐다는 생각에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다고 한다.
아홉수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 아닐까.
누군가는 손에 잡히지 않고 흘러내리는 모레처럼, 지나가는 20대가 아쉬워서 밤새 술을 마시고 슬퍼했다고 한다.
그저 한 살 더 먹은 것뿐인데 길거리를 지나가며 마주치는 대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모습이 그 자체로 생기발랄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된다. 더 젊고 어리게 보이려고 화장품이며 옷 스타일을 바꾸기도 하고, 20대에는 관심도 없었던 연하남이 갑자기 남자로 보이게 된다고 했다. 주변의 이야기에 따르면 많은 이들은 20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원래 생일이라고 특별하게 축하를 하는 편은 아니기도 하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나는 30대가 되던 그날 밤도 소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거리며 티비나 보고 있었을 거다.
몇 살인지 기억해내려면 30초 정도 고민 후 옆 사람에게 한번 확인 차 물어봐야 할 정도로 무딘 편인데도(만 나이와 헷갈려서), 나도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주변에서 나를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항상 대학생 소리를 들으며 살던 노안이었는데, 서른이 넘자마자 사람들이 나에게 처음으로 어려 보인다고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 이제 제 나이로 보이는 건가?" 하고 혼자 기뻤는데, 반복해서 같은 얘기를 들을수록 느낀 것은 "어려 보인다" = "나이가 많구나"와 동일한 정도의 의미라는 걸 알아냈다.
부모님, 조부모님, 직장동료 들의 시시때때로 치고 들어오는 "결혼하고 애 낳아야지" 잔소리는 삶의 별첨이다. 물론, 나도 서른이 된 남동생에게 "서른이 되니 정말 어른 같아졌군!" 같은 서른 살의 프레임을 곧잘 씌운다.
내가 요새 가장 즐겨보는 프로그램인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최근 일반인 남녀들이 나와 소개팅을 하는 회차가 있었다. 매력적인 여성 분들이 여럿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은 어린 대학생 여성이 서른 살이 넘은 직장인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댓글에는 하나 같이 역시 여자는 어린고 이쁜 게 최고라는 등등의 이야기들이 많았다. 음. 나이가 어린것의 장점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군. 잠시 잊고 살았던 것 같은데 뻔한 이야기들이 아직 사회에 많이 통용된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서른의 여성들도 충분히 예쁘고 매력있었고, 정확히 왜 어린게 최고인건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하긴, 한 남사친이 말했다. 남자의 서른 살은 여자의 스무 살과 같다고. 처음 갓 대학에 입학한 여자애들이 가장 인기가 많듯이, 남자들은 서른 살에 그 인생의 전성기가 찾아온다나. (본인도 서른이 넘어 인기가 많아졌다는 맥락에서 나온 얘기다)
그래, 되돌아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연애,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이별, 새롭고 두근거리는 만남... 등등의 사랑 관련 이벤트 들은 대부분 20대에 집중되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랑만장한 삶은 나의 20대와 함께 끝난 듯 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때를 그리워하는건 아니다.
십 대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난 그냥 고등학교 공부가 싫었다.
스무 살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어도 엄마가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때 정말 기뻤다. 나이를 먹는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다. 아침 마다 찰떡 아이스를 먹을 수 있는 것 같이.
이십 대의 내가 십 대를 그리워하지 않았듯이, 서른 살이 된 나는 이십 대가 그립지 않다. 나만 그런 건지 궁금해서 친구 A에게도 물어봤다.
"너는 2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별로!"
그녀는 손사래 +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친구 B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대답은 같았다. 우리 모두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세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난 그녀가 왜 아니라고 답했는지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중요했던 인생의 많은 시점에 함께 했다.
우리의 이십 대는 각종 현란한 연애와 파란만장한 이벤트로 가득했다. 돌이켜 보면 사랑도 있었지만, 그 반대도 있었다. 어찌 보면 사랑 자체보다 그 부산물들에 더 시달렸던 때였다. 차마 때리지 못한 싸대기, 시원하게 못 날린 욕지거리, 먼저 차지 못한 서러움, 한 없이 지질해졌던 그 모습, 굳이 매달리지 말아야 했던 그 순간 까지... 한 사랑의 종료 후 우리가 함께 기울였던 소주잔들이 얼마나 많을런지.
그 시간을 거쳐냈기에 지금의 조금이나마 더 성숙하고 평안한 서른 살의 현자 타임에 도달했다. 우리는 이 굳은살 덕분에 아픔에 조금 무뎌졌고 또 강해지기도 했다.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커리어 때문이기도 하다.
일과 경력과 관련해서도 서른 살의 나를 만들기 위해 갈고닦아야 했던 이십 대의 준비기간은 혹독했다. 말마따나 인생에 뭐 하나 공짜는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 나의 피와 살이 되어있는 것들 하나하나 게으름/피곤함/졸림과 싸워 얻어낸 승전물이다.
종종 이십 대 초반부터 자기의 목적지를 잘 알고 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의 이십 대는 안개와 스모그로 한 치 앞도 안보였던 런던의 1952년과도 같았다. 난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지렁이였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했다. 뭐든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냥 닥치는 대로 해내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고, 쓸모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데 한참을 낭비하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그때그때 필요대로 진화하다 보니 약간 기형이 된(?) 어떤 생명체가 되긴 했지만.
뭔가 되긴 되었다.
서른 살의 나는 평안하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녀서 그런 것도 아니다. 여전히 계약직의 삶을 전전하고, 이 계약 다음엔 어디를 가야 하나 항상 고민하고 구직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아는 "인생의 길눈"이 밝아졌다. 앞으로의 미래를 때로 걱정하지만, 예전처럼 답답하고 막연하진 않다. 이렇게 계속 내 길을 가다 보면 어디련가 목적지가 있겠지 생각한다.
삶을 대하는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긴 것은 삶의 경험치에서 기인하지만, 또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때문이다. 부자는 아니지만, 지금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통장에 당장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의 저축이 있고, 사지가 멀쩡하니 뭐라도 해서 먹고살겠지 생각한다.
물론 십 년 후에 내가 상상하는 국제기구의 여성 디렉터가 되어있다면 아주 멋질 거다. 하지만 이제 난 단순히 "장래희망을 이루는 것 = 행복"이 옳은 방정식이 아님은 알고 있다. 치열하게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향해 가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작은 일에서 기쁨을 느끼며 주변의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래, 서른 살의 나는 스무 살의 나보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난 지금의 내가 좋다.
어렸을 때는 끔찍하게 싫어했던- 운동하면서 내 옷에 땀을 적시는 야만적인 행위-를 이제는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게 되었고. 부모님이 억지로 끌고 갔을 때는 훈련 같았던 등산이란 것도, 가끔 어려운 머리를 정리하려 혼자 오르다 보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한지 알게 되었다.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어떤 스타일이, 화장이 좋은지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더 이상 엄마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러나 통장의 잔고 눈치를 보고) 살 수 있게 되었고, 굳이 얼마에 샀는지 왜 또 비슷한 원피스를 샀는지 택배를 숨겨 놓거나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종종 너무 많은 택배가 오면 숨기기는 한다)
맥주 세 잔이상을 마시면 내일 아침이 힘들지 안다. 내 인생에 누가 중요하고 덜 중요한 사람인지 안다. 소중한 사람들을 더 잘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이 있어서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정말 많은 것들이 더 편하고, 재미있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난 삼십 대의 이런 내가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