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의 비밀을 발설한 사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발악을 하다
여보, 잠깐, 일단 앉아 봐.
그래, 알아. 지금 무척 배신감 느끼는 거.
하지만 당신 말만 그렇게 하고 가지 말고 일단 내 말도 좀 들어보라고.
내 말 듣고 나를 찢어 죽이든, 애기 데리고 도망치든, 상관없어. 일단 오해는 풀어야지.
당신 이렇게 그냥 가면, 나, 못살아.
당신이랑 애기 때문에 못 사는 게 아니라, 억울해서 못 산다는 말이야.
이건 정말 거대한 오해야. 진정하고 일단 내 말부터 들어보고 판단해.
자, 당신이랑 나랑 처음 한 약속이 뭐야.
당신이 날 안 죽이고 살려준 거, 그땐 여우였지. 그때 그 사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란 거였잖아.
그래. 지금 내가 그거 어겼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야.
자, 잘 봐. 기억해 보라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이게 당신 부탁이었잖아?
잘 생각해봐. 좀 헷갈릴 수도 있어.
자, 내가 누구한테 말했어?
우리 엄마? 옆집 덕이네 아빠? 나무 팔아주는 김영감댁 식구들?
아니잖아.
나, 당신한테 말한 거야. 그때 여우가 살려준 거... 그거 여우인 당신한테 이야기 한 거라고.
우리가 보통 이런 얘기하잖아.
"이거 우리끼리만 아는 거다. 딴 사람한테 말하면... 그땐 정말 끝이야. 죽여버릴 거야."
이럴 때 '딴 사람'이 누구야?
당연히 너랑 나 빼고 다른 사람이지. 우리끼리는 괜찮다는 뜻 아냐?
당신이 비밀 지키라고 한 거, 나는 진짜 딴 사람한테는 말한 적 없어. 앞으로도 안 할 거고.
근데 당신한테는 말하지. 우리는 비밀을 공유한 사이잖아.
당신 기억 상실증이야? 그때 일 까먹고 있었다가 지금 내가 말해서 안 거야?
아니잖아.
뭐? 내가 당신 여우인지 몰랐으니까, 사람인 줄 알고 말한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약속을 어긴 거라고?
허허... 진짜...
당신 왜 그렇게 눈치 없어?
지금까지, 이 3년 동안, 내가 진짜 당신이 여우인 줄 몰랐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야?
실망이다.
사람을 이렇게 등신으로 봤다니...
내가 아무리 배운 게 없고, 땅이나 파먹는 무지렁이 농사꾼이지만...
당신, 사람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나 이래 봬도 머리 하나는 좋아.
판단력, 통찰력, 추리력, 논리력...
내가 태생이 이래서 천자문도 못 떼고 과거도 못 볼 형편이라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당신 나랑 살면서 한 번도 '이 남자 머리 좋네.' 라는 생각, 안 해봤어?
정말 충격이네...
야, 이건 정말 충격을 넘어서... 섭섭하다. 섭섭해.
3년 동안 같이 지지고 볶고 살던 마누라가...
나를... 이렇게 어디 길바닥에 널브러진 등신 천치로 생각했다니...
진짜...
내가 지금까지 땅 파먹으면서 온갖 수모를 견디며 오직 내 새끼, 내 마누라만 보고 이렇게 견뎌 왔는데...
와이프란 사람이 나를 그렇게 까지 밖에 안 봤다니...
흑...
가, 여보. 그냥 가.
그렇게 나를 어디 길거리에서 주운 노리개처럼 손에 갖고 놀다 버리는 그런 존재로 생각했다면...
가라고. 차라리 여기서 끝내는 편이 낫겠어.
나를 그정도로만 생각했다니.
당신이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 봤는지 알았으니까...
모든 게 소용 없어졌어.
... 아직 안 갔어?
미안.
내가 좀 흥분했지...
다시 말해 볼게.
내가 당신이 여우였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잖아.
그때, 당신이 나 안 죽이고 놔줘서 내가 집으로 올 때, 당신 저 뒷산 언덕에서 예쁜 저고리 입고 서 있었잖아. 그러곤 나를 따라와서 우리 엄마한테 인사하고 밥도 차려주고...
야, 솔직히 말이 되냐.
농사나 지으며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노총각.
인물도 별로고, 가진 거라곤 발로 차면 픽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하나 달랑 가지고 있는 남자한테...
당신 같은 절세미인이 시집온다?
이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냐고.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모른 척했지만 당연히 알고 있었지.
아, 이 분이 그때 나 살려주신 그 여우님이구나.
사람으로 변장했구나.
그거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데?
아니, 당신 절세미인 맞아.
옆집 덕이네 아빠도 처음에 당신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니까.
내가 전에 장날 읍내 나갔을 때, 당신 반달빗 사준다고 같이 갔었잖아.
거기 난전에 장사꾼이며 손님이며, 남정네들은 다 당신 흘깃흘깃 본거 모르지?
내가 장날마다 당신 데리고 가는 이유가 있다니까.
내가 읍내 나갈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어쨌든 이야기 계속 이어 가면,
당연히 알았지.
그리고, 당신 오고 나서 우리 집 밥상이 달라졌잖아.
내가 갖다 주는 돈이 얼마나 된다고 우리 엄마 밥상에 매 끼니 고기며 젓갈이며... 온갖 맛있는 반찬 올려주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나?
아이고, 여우님이 내 수입이 일정치 않으니 손수 고기를 잡아다 시어머니 봉양하시는구나.
그때 딱 눈치 깠지.
이제 한 3년 됐지?
나는 당신도 당연히 내가 눈치챈 거 아는 줄 알았지.
당신, 생각보다 좀 둔하다? 그걸 몰랐다니.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니까. 나 몰라? 내가 눈치 하나는 또 빠삭하거든.
그래서 오늘 이야기한 거야.
딴 사람도 아니고 비밀을 나눈 당사자끼리 말한 거는 이거, 비밀 약속 어긴 거 아니다?
인정해 안 해?
당신은 친구랑 비밀 이야기 하면 그 사람하고 그 이야기 절대 안 해?
하잖아.
나만 아는 비밀이니까... 우리끼리는 이야기한 거야.
이제 이해가 가지?
그래...
오해 풀려서 다행이다.
고마워. 당신.
이 안동 땅에 기품 있고 잘생긴 선비들도 넘쳐나는데, 나같이 못생긴 놈한테 와줘서.
정말... 고마워... 흑...
그래? 딴 건 몰라도 내 인물이 좀 되긴 하지?
고마워. 당신밖에 없다.
이제 오해도 풀렸으니,
우리 이제 밥 먹자.
내가... 당신 좋아하는 미역국 해놨어.
소고기는... 그래, 당신이 사 온 거 맞지?
잡은 거 아니지?
그렇게 알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