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어머니께서 담낭 제거 수술과 담도 확대시술을 받고 퇴원한 이후 석 달만인 11월 30일 병원에 재입원을 하셨다. 개인적인 문제를 처리하느라 부산에 가보지도 못한 채 안타까워하다 오늘에야 부산을 찾았다.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CH의 전화를 받았다. HS의 모친께서 새벽에 별세하셨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막 시술을 끝낸 어머니께서 고통으로 가득한 얼굴로 누워 계셨다. 지난번 담도 확대 시술한 곳의 담도가 다시 막혀 담즙이 외부로 흘러나올 수 있도록 호스를 꽂는 시술을 했다고 했다.
이런저런 검사와 시술을 마치고 난 어머니께서 많이 피곤해하셨고, 기력도 많이 없어 보이셨다.
하긴, 몇 달을 제대로 음식을 드시지 못했는데, 기력이 남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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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HS 모친 문상을 갔다.
누군가가 그랬다. 요즘은 청첩장보다 부고장이 더 많다고...
또 누군가가 그랬다. 우리 나이가 이제 그럴 때가 됐다고...
- 2001년 12월 5일 물.
어머니께서 계시는 병실은 8인실이었는데, 내과병동이어서인지 당뇨환자가 많았다. 같은 병실을 쓰는 대다수의 환자가 기동을 하는 편이어서 한밤에 간병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누나가 귀띔을 했다.
멀리 있으면서도 안타까워하기만 했는데, 가까이 있으면서도 밤에 간병을 안 하다니...
죄스런 맘으로 어머니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 2001년 12월 6일 나무.
화요일의 시술에 이어 2차 시술을 했다. 아직도 막혀 있는 반대쪽 담도에서 담즙을 빼내는 호스를 꽂는 시술이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예상한 어머니의 시술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두 시간이 채 못된 시각부터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시술실안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비명은 40여 분간 계속되었고, 그 소리가 잦아들자 담당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어머니의 담도 사진에서 암덩어리로 가득 차 뚝뚝 끊어져 보이는 담도를 확인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호스를 들여보내려 했으니 좀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이번 시술은 원래 목적한 담도로 호스를 집어넣지 못한, 결과적으로 그냥 시도에 그쳐버린 시술이었다. 시간이 지체된 이유도 여러 차례 시도를 한 까닭이었고, 오늘 두 번째로 들어간 호스는 빼내지도 못했다. 행여 그 호스를 빼내게 되어 담즙이 흘러나올 경우 담즙 복막염 발생이 우려된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두 개의 호스를 몸에 달고 있어야만 했다.
시술 전, 의사가 이 시술은 병의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연장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수반하는 시술이라면, 오히려 안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께 앞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고통과 통증만이라도 덜어드리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
참담한 마음에 병원의 베란다에 나섰더니, 마치 내 마음 마냥 노을이 핏빛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2001년 12월 7일 쇠.
원래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다. 어머니 곁에 장기적으로 있기 위한 짐을 챙겨 부산으로 되오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출발은 미뤄야만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술을 끝낸 직후 본 핏빛 노을과 오늘 새벽에 본 하늘의 별 세 개(어머니, 누나, 나를 뜻하는 것이었을까)가 어머니의 곁에 있도록 더더욱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
담당의사를 만나 어머니의 상태를 물었다. 담낭에서 시작한 듯한 암은 이미 그 담낭을 4개월 전에 제거하게 만들었고, 현재는 담도 전체에, 그리고 일부는 후두에, 일부는 폐에, 그리고 곧 간으로 옮겨갈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배에는 복수가, 폐에도 조금이나마 흉수가 차 있다고 했다. 얼마나 사실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렇게 지내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으며, 길어야 3개월이라고 했다. 지난 8월만 하더라도 암은 담도의 일부에만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빨리 전이가 되어 버렸는지
의사 자신도 진행의 속도가 너무 빨라 당황스럽다고 한다. 밤새 헛구역질을 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속으로 몰래 눈물을 삼켰다.
- 2001년 12월 8일 흙.
토요일이라 세명의 환자가 퇴원을 했다. 토요일에는 퇴원이 많다고 했다. 퇴원하는 환자들 모두가 빨리 쾌차하라는 말을 전했지만, 어머니의 쾌차를 이미 포기한 나로서는 어색한 미소만 지을 수 있었다.
창가의 자리가 하나 비어 어머니의 침대를 그쪽으로 옮겼다. 병원 뒤편 야트막한 동산과 그 위로 보이는 하늘이 어머니께 좋은 풍경을 드렸으면 해서다.
8인실은 병실비가 모두 의료보험으로 공제되기 때문에 돈 없는 많은 사람들이 탐을 내는 병실이다. 그래서인지 침대가 비자마자 다른 병실에서 환자들이 밀려들어온다. 어지간히 시끄러운, 말이 많은 환자가 새로 들어왔다. 붙임성도 좋아, 이 환자 저 환자에게 다가가 걸걸한 목소리를 해댄다. 여태 이 병실에서 교통사고로 두 달여를 보낸 SJ아줌마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다. 불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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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아버지, 형과 같이 차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답답함만 가득할 뿐 뚜렷하게 답이 제시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집으로 가서 같이 자자고 했다. 어머니께서 내 손을 꼭 붙들고 놓지를 않으신다. 어머니 귀에다 나지막이 '저 가지 말까요?' 하니 가만 고개를 끄덕이신다. 여태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는 어머니셨다.
눈시울이 벌게지신 아버지를 택시에 모셔 혼자 보내드려야만 했다.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 2002년 12월 9일 해.
어제 새로 들어온 시끄러운 젊은 아낙(YW)과 SJ아줌마가 결국 아침부터 설전을 벌였다. 병실의 변기가 막혔는데, SJ아줌마는 YW탓이라며 빨리 청소할 것을 지시했고, 변기가 막힌 게 왜 자기 탓이냐며 YW가 대어 드는 통에 병실이 꽤나 시끄러웠다. 앞으로도 계속 시끄러울 병실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자니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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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일을 걱정하시는 어머니께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께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왔음을 어머니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고 일단은 물러서야만 했다. 잠시 올라가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오마고 말씀드리고 집으로 올라왔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딸아이가 꽤나 반가운 얼굴을 하지만, 이별에 익숙한 아이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내가 딸아이에게 '아빠 오면 어떻게 해준다고 그랬지...?'하고 말하니 딸아이가 나의 귀를 잡고 뽀뽀를 해준다.
'아이 따가워...'
부산에 있으면서 내내 길러져 있던 수염에 딸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따가우면 어떻게 뽀뽀하면 되지...?' 했더니 딸아이가 입술을 길게 내밀어 다시 뽀뽀를 하려 한다. 나도 입술을 길게 내밀어 딸아이의 뽀뽀를 받으며 딸아이를 가만 보듬어 보니 조금 전 떠나온 어머니가 생각났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품에 안긴 딸아이의 등을 다정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 2001년 12월 11일 불.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안 지인들이 여기저기서 전화와 메일을 주며 안부를 물어온다. 그들의 안부에는 대뜸 '지금 어디냐?'라는 말이 나온다. 고마운 그들에게 일일이 답신과 대답을 해 주다 보니 부산을 떠난 지 벌써 이틀이 지나버린다.
낮에 어머니께서 호흡곤란을 겪고 있다는 큰누나의 전화가 왔다. 산소 흡입호스를 코에 대었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 저녁 무렵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산소 흡입호스는 떼어 내었고, 지금은 주무시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몇몇 지인들을 만나 술을 한잔 청해 보았지지만 긴장 탓인지 술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 2001년 12월 12일 나무.
오늘만 해도 송년회가 세 개나 있었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지금의 마음으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던 탓이다.
내일 부산엘 내려가마고 생각하다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할 집이어서 일부러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며 짐을 쌌다. 병원에서 입고 다니기에 편한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구두, 내의와 양말, 휴대폰 충전기도 잊지 않았다. 뮤직메일을 위한 음악파일을 노트북에 옮겨 담으면서, 앞으로 얼마나 뮤직메일을 보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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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고 전해 들은 누나가 지금 어머니께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며 울먹이는 전화를 했다.
- 2001년 12월 14일 쇠.
아침에 또 딸꾹질을 시작했다는 누나의 전화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영등포역에서 좀 더 일찍 가보려 기차 시간을 조정해 보았지만 좀처럼 표를 구할 수 없었다. 겨우 예약한 것보다 30분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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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 도착해 보니 작은 자형이 고속버스 편으로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머니의 상태를 보니 조금은 진정된 모습이셨다. 얼굴은 형편없이 부어 있었고, 목 주위는 지난번보다 더 부어 있는 것 같았다.
'아들 왔소...'
어머니의 손을 살짝 잡아보니 붓기 때문에 제대로 눈도 못 뜨시는 어머니께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쳐다보셨다. 못난 아들의 손을 더 따뜻하게 쥐어 보시며 애써 미소를 지으셨다.
- 2001년 12월 15일 흙.
같이 밤을 새운 누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동안 혼자서 밤을 새우느라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던 까닭이다. 어머니께서는 주기적인 토악질과 통증을 호소했다. 통증은 세 시간 간격으로 계속된다고 누나가 귀띔해 주었지만, 오늘은 대여섯 시간 간격으로 통증이 오는 것 같았다.
'아들이 오니 통증도 덜한 모양이오...'
내가 어머니께 농을 걸었더니 누운 채로 가만 미소만 지으신다. 어머니께 이따금 농을 걸며 최대한 어머니의 맘을 풀어 드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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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악질은 계속되어 음식물을 제대로 드시질 못한다. 조금이라도 권할라치면 입이 쓰다 그러신다. 계속되는 구역질 때문에 먹은 음식도 되넘어 오는 형편이라 어머니께서는 계속 음식을 본척만척하신다. 여럿이 쓰는 병실에 식사시간이 되면 풍기는 음식 냄새 때문에 식욕이 당길 수 있을 텐데도 어머니는 전혀 반응을 보이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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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큰 이모, 큰외삼촌, 작은 이모가 차례로 병실에다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전화를 받으니 모두 다 놀란 눈치다. '어머니 어떠시냐...'는 말에 '아들이 와서인지 잘 지내시는 것 같다...'라고 했더니 효자 났다며, 이 불효자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 2001년 12월 16일 해.
어머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잠을 깼다. 내가 누워 있는 야트막한 간병인 침대로 어머니께서 내려서려고 하셨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경. 화장실에 가신다고 하셨다. 화장실에 다녀오시게 한 후 어머니를 침대에 뉘고 한참 동안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어머니의 나지막한 코 고는 소리에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어 드린 후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엔 달도 없이 아주 적막하였고, 담배를 힘껏 빨아 안도의 한숨을 연기에 실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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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제와 링거를 꽂은 주사액이 들어가질 않아 바늘을 빼고 한참만에 다시 주사를 꽂았다.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어머니는 주사를 24시간 계속 꽂아 놓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양팔은 주삿바늘에 찔린 자국으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누군가 혈관도 주사를 맞으면 바늘을 피해 숨어 다닌다고 했다. 한참을 혈관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찔러 대는 간호사가 얄밉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그것마저도 태연자약하시다. 속 안의 통증이 그 바늘의 통증에 비기랴. 하릴없이 다른 간호사, 조금은 숙련된 간호사가 와서 한방에 주삿바늘을 꽂는다. 그 간호사가 정말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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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병원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더더구나 8인실은 찾아온 가족들로 넘쳐나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몇몇 친척들이 찾아왔지만, 내심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다. 내방객이 많을수록 환자나 간병인은 더욱 불편하다. 물론 아주 반가운 경우를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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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누나가 이틀 만에 다시 병실로 왔다. 내가 이틀 동안 서서히 기력을 소진하고 있을 때 찾아준 구원투수인 셈이다. 저녁때까지 잠시 눈을 붙인 후 누나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누나와 나는 집에 갔다가 다시 오기가 더 힘들다며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말은 사실 회사 다닐 때 내가 곧잘 하던 말이었다며 한번 더 웃었다. 오랜만에 누나와 시간들을 보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수록 살아 있는 자의 정은 더 깊어가는 것일까... 문득 영화 '축제'가 생각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인지...
- 2001년 12월 17일 달.
며칠째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고 나니 온 몸이 찌뿌둥해졌다. 아침 일찍 병원으로 나온 누나가 어디 가서 잠이나 자고 오라고 했다. 어머니 얼굴을 보니 어제보다는 보기가 좋은 것 같아 마음을 다소 놓으며 목욕탕엘 갔다.
목욕을 마친 후 점심을 먹고 다시 병실로 들어오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는 듯 누나가 날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누나에게 채근을 했더니 그사이 시술실에 다녀왔단다. 며칠째 2차 시술한 곳의 호스에서 담즙이 조금밖에 나오지 않더니 추이를 지켜본 결과 호스가 담도에서 이탈되어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상처가 잘 아물어 담즙 복막염은 염려가 없어 아예 호스를 제거하는 시술을 했다고 한다. 그 시술한 자국을 꿰매고 온 어머니는 오히려 한 짐 덜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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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KH가 병원을 다녀갔다. 마치 날 위로해주기 위해 왔다는 듯 차도 가져오지 않은 채 와서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김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한다. 여러모로 자신의 상황도 힘들 텐데 날 위해 먼 길을 온 친구가 고마웠다. 병실은 누나가 지키기로 하고 느지막이 아버지께 가서 잤다.
- 2001년 12월 18일 불.
일찍 병원으로 출발하려 하였으나 맘처럼 쉽지 않았다. 老父가 마련해준 늦은 아침을 먹고 직접 내오신 커피까지 한잔 마시고 오자니 시간이 꽤 걸렸다. 그렇게 나마 자식에게 먹이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내가 이해함에, 또한 그 뜻을 물리칠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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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해 누나와 또 교대를 했다. 누나는 자신의 몸은 비록 피곤하지만 집에 가 쉬고 싶어도 맘이 편치 않단다. 행여 자신이 없는 동안 어머니께서 별세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불안해서란다. 그런 누나를 애써 달래며 집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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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여전히 30분 간격으로 구역질을 하셨다. 먹은 것도 없기 때문에 그 양도 침 몇 줌에 불과할 정도이다. 음식물을 권해 보았지만 그냥 마다하신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숨결이 거칠다.
- 2001년 12월 19일 물.
어머니의 영양제가 Hepatamin 500ml에서 NutriFlex peri-40 1000ml로 바뀌었다. 생긴 모양도 유리병에서 넓적한 비닐봉지 형태였다. 어떤 약이 들어가나 싶어 한참을 들여다보니 전해질 첨가물과 영양제였다. 어머니께서 겨우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것은 링거와 저 영양제뿐이고, 그것이 곧 밥이다. 그 밥이 바뀌었으니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보험도 안 되는 약물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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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아침은 보통 5시부터 시작된다. 체중과 체온을 재고, 혈압과 맥박을 재고, 밤새 누었던 소변과 대변의 양을 재고... 그렇게 하느라 간호사들이 부지런히 오가기 때문에 소란스러워 잠을 곤히 잘 수가 없다. 7시경이면 아침식사가 온다. 약이 가득한 카트가 오는 것도 그 무렵이다. 8시에 대개 그 약을 먹게 되는데, 오늘은 어머니께서 약을 드신 후 물을 달라고 하신다. 의아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며 어머니께 물을 건네니 어머니께서 한숨에 물을 들이켜신다. 누나에게 알려줄 빅 뉴스거리다. 그만큼, 어머니께서 음식물을 본인이 원해서 드신다는 것이 뜻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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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회진을 돌던 의사가 전해질 보충이 필요하니 오렌지주스와 바나나를 먹여 보라고 권했다. 점심때 먹는 약에 그동안과는 달리 소화제와 위장약이 덧붙여 나왔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소화제와 위장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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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와 내가 나가서 저녁을 먹기가 너무 질려 저녁께에 양념통닭을 시켰다. 음식에 별 관심이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한 조각을 달라셨다. 그냥 농담이려니 하고 제법 큰 조각을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맛있게 드셨다. 너무나 신기하고 의아해서 한 조각을 더 드렸더니 또 맛있게 드셨다. 누나와 나는 너무도 신기해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뭐 드시고 싶으신 게 없냐고 했더니 소화가 잘되는 찰밥이 드시고 싶다셨다. 누나가 내일 준비해 오마고 했다.
그러나 오후 9시쯤 어머니의 토사물 속에 많이 소화되지 않은 통닭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 2002년 12월 20일 나무.
누나가 된장찌개와 찰밥을 장만해왔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별 드실 의향이 없으셨던가 보다. 어렵사리 장만해온 누나가 약간은 토라진 기를 보였다. 내가 오렌지주스와 전해질 음료를 사 와서 드시게 했다. 어머니께서 조금 드시다 말고, 오늘따라 유난히 잠을 많이 주무셨다.
점심때에 어머니께서 우동을 먹고 싶다고 하셔 냉큼 우동을 하나 사 왔다. 국물과 약간의 면을 맛있게 드셨다. 그리고 낮에는 별로 토하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저녁 들면서부터 토악질이 심해지셨다. 오전과 점심때 드셨던 조금의 것들이 그대로 토사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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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악질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너무 울적해졌다. 누구라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오래전 기억 속 고향은 낯선 타향보다 못한 것일까. 강산은 그대로일지라도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오래전 친구들이 있는 고향이지만 예전의 기억처럼 이 마음을 나눌 수 없는, 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이 고통을 혼자 안으려니 나의 인내에는 너무 벅찼다. 토악질을 해대는 어머니가 안타까워서 누나도 집으로 가지 못하고 곁을 지키겠단다.
잠깐 어디 다녀오겠다며 병원을 나와 혼자서 술을 마셨다.
- 2001년 12월 21일 쇠.
어제 누나가 마련해둔 된장찌개와 찰밥을 아침거리로 둘이서 나눠먹기로 했다. 병원에 있는 전자레인지로 된장찌개를 만들고 간병용 간이침대에 두 사람의 아침상을 차렸다. 어머니께서 가만 내음을 맡으시는 것 같더니 찰밥을 김에 싸서 달라고 하셨다. 얼마 드시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 조그맣게 김에 밥을 말아 건넸더니 달게 드셨다. 그리고선 또 달라고 하셨다. 제법 많은 양의 밥을 김과 함께 드셨다. 물론 오렌지주스와 전해질 음료도 드셨다.
어머니께 '음식 드실 기분이 나세요?'하고 여쭈니 평상시에 있던 목 안쪽의 쓴 기운이 없어졌다고 하신다. 아마도 담즙이 빠져나오니 그런 기운이 없어졌고 그래서 입맛이 도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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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께 KH와 CH가 다녀갔다. 어제는 너무 울적해서 혼자 술을 한잔 했다고 하니 두 사람이 언제든 부르라고 했다. 녀석들도 가정을 가지고 있는 몸들인데...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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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저녁 무렵에 유별나게 식탐을 하셨다. 누나는 그게 즐거운 듯 보온병을 들고나가 병원 앞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사들고 왔다.
모처럼의 즐거운 식사를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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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늦게 KY의 전화를 받았다. PDA 게시판에 쓰인 오래 전의 내 글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단다. 그의 노모도 고향에서 치매가 있어 형제들이 간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맘때쯤의 나이면 누구든 부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늘 건강하시리라, 잘 계시리라 생각만 했던 부모님들께서 하나둘 노환과 질병으로 스러져가는, 그런 즈음이다. 자식들이 그나마 먹고살 만 해지면 부모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고 쓰러져간다는...
子欲養而親不待라는 옛말이 절로 생각나는... 그런 때인가 보다.
- 2001년 12월 22일 흙.
며칠 전부터 Methoclopramide라는 주사제가 투입되어 어제부터 구토가 진정되는가 싶더니 아침 9시경 한차례 구토가 있고, 그 토사물에는 어제 먹었던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또 한 번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9시쯤이면 보통 주사를 맞게 되는데 며칠 전부터는 한 번에 맞는 주사가 7~8개로 늘어나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느낌이다. 생명연장을 위한 저 주사를 맞지 않았다면 구토가 없었을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진통이 잦아짐에 따라 진통제의 양과 질도 한층 강화가 됐다. 새벽에 많은 진통을 호소하시던 어머니께 오늘은 다른 처방이 내려졌다. Duragesic이라는, 가슴에 붙이는 패치 같은 것인데, 그것을 가슴에 붙이고 있으면 통증이 다소 가라앉는다고 했다. 그래도 아프면 어떡하냐고 의사에게 되물었더니 그때는 할 수 없이 또 주사를 맞아야 된다고 했다.
어머니께 어떤 처방이 내려지고 있는지, 어머니께서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다 보니, 내가 반의사가 된 듯한 기분이다.
심신이 노곤한 듯하여 목욕탕을 찾아 목욕을 하였는데, 긴장이 풀렸는지 온 몸이 노곤해져 오후 내내 잠이 찾아왔다.
어제 병원에 들렀던 KH와 CH가 나와 같이 술을 한잔 하고 싶다 하여 저녁에 잠시 보았다. KH 역시 아버님이 전립선으로 몸이 좋질 않아 동병상련하고 있는 듯했다. CH는 작년에 사고로 돌아가신 부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갑자기 돌아간 부친 때문에 임종도 못 보고 보낸 게 한스럽다고, 내가 어머니의 임종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부럽다고, 그의 회한을 술잔에 담아 함께 마셨다.
- 2001년 12월 23일 해.
새벽에 다시 병원으로 찾아오니 누나가 밤새 한잠도 못 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웃음만 지었다.
누나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어머니께 여쭤 보니, 오줌 때문에 새벽에 5번이나 바지를 갈아입었다고 하셨다. 누나가 간호사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여 여러 번 바지를 구하다가 지금은 기저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주사제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런가 하고 의아해했다.
날이 밝아 다시 본 어머니의 얼굴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붓기가 심했고, 오른쪽 눈은 아예 뜨지를 못했다. 누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얼음으로 붓기를 진정해보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붓기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밤에 잠을 못 주무신 탓인지 종일 어머니께서는 주무셨다. 행여 그 사이에 무슨일이 있을까 싶어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낮에는 새벽처럼 오줌을 자주 보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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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간호사들이 날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느낌을 누나에게 말했더니 내 나이 또래의 남자가 하루종일 간병하는 것이 병원에서 좀체 보기 힘든 일이라서 그럴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간병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들이고 간혹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머리가 허연 노친네들이다. 정상적인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남자가 한낮과 온밤을 간병하는 것은 드물거라는 생각을 하니 간호사들의 의혹에 찬 눈길들이 이해가 가, 살풋 실소를 가졌다.
- 2001년 12월 24일 달.
새벽녁 어머니께서 1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시려 하셨다. 소변이 너무 잦아 화장실을 가시면서도 두번이나 기저귀를 갈았다.
바깥 날씨가 추워서일까, 유난히도 난방이 뜨거운 듯 어머니께서 갈증을 호소하셨다. 매일 아침 7시에 채혈이 있는 관계로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는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시는데, 목말라 하시며 애써 참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4시반쯤에는 답답해 하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복도로 나섰다. 조금 시원한 곳을 찾아 어머니를 천천히 태워 이리저리 다니다 어둑한 거리풍경을 한참이나 보여드렸다. 자판기 앞을 지날때 문득 어머니께서 콜라가 마시고 싶다고 하셨다. 사이다도 마시고 싶다셨다. 그리도 갈증이 나셨나 보다.
7시쯤 채혈하는 사이 자판기를 찾았다. 사이다를 하나 꺼내어 병실로 돌아가 보니 어머니 팔이 퉁퉁 부어 핏줄을 못찾는 모습이 보였다. 형편없는 남자 인턴이 잠시 사라진후 익숙하게 피를 잘 뽑는 여의사가 나타났다. 채혈을 하자 마자 채혈한 자리를 솜으로 누르며 어머니께 사이다를 종이컵에 2/3 가량 드렸다. 어머니는 목내어 기다리신 듯 단숨에 들이키시고 조금 더 달라셨다.
어머니께 사이다를 더 따라 드리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8시 반쯤 아침 회진이 있었다. 내가 양 손이 많이 부었다고 했더니 담당과장이 어머니의 가슴을 보자며
청진기를 들이대었고, 가슴을 타진해 보기도 했다. 청진기와 타진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저게 무언가...
...
방학을 맞아 아내와 딸아이가 오늘 부산에 오기로 했다. 내가 막내 이듯이 내 딸아이도 막내 손녀이다. 어머니께서는 벌써 내 딸아이 이야기를 하시며 얼굴에 미소를 가지신다. 눈도 안 떠지게 부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얼굴에 붓기가 다소 빠져 보였다.
'손녀 보실려고 오늘은 눈도 떠셨네요...'
누나와 내가 또 농을 걸며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리려 했다. 어머니께서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이며 머리를 닦아달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손녀가 온다고 꽃단장을 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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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쯤에 담당의사인 최선생이 병실을 찾았다. 어머니께 한두가지 질문을 던지더니 날더러 잠시 보자고 해 바깥 복도로 나갔다. 어머니께서 얼마 남지 않았으며, 상당히 위독한 상태라고 했다. 전해질이 불균형하다고 하며 칼륨수치가 지나치게 높다고 했다.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고, 다른 장기들도 제 역할을 못한다고 했다.
겉으로는 저렇게 멀쩡한데, 얼마 남지 않았다니... 며칠전의 호흡곤란과 토악질 등 나타나는 증세에 관한 처방은 벌써 끝났고, 부기와 잦은 소변도 그에 이은 증세라는 뜻인가... 그리고 아침에 있었던 가슴의 청진기와 타진도 곧 이어 나타날 증세라는 말인가... 그러고보니 며칠전만 하더라도 7~8개나 되던 주사가 두세개로 줄었고, 처방도 어제 오늘이 다른듯 했다.
최선생은 어머니의 최후를 세가지로 예측했다.
의식은 저렇게 멀쩡하시지만 언제 올지 모를 혼수상태와 고칼륨으로 인한 심장정지, 흉수로 인한 호흡곤란, 신부전으로 인한 사망...
눈앞이 아뜩해오는 듯 했다.
조금 있다 간호사가 들어와 주사병을 하나 더 링거에 연결했다. 내가 어떤 약이냐고 물으니 약간의 인슐린과 그외 처방이라고 했다. 당뇨가 있어서 그러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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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조금의 위안이 될 딸아이와 아내를 마중하러 부산역에 갔다가 되돌아오니 그새 또다른 경구약이 처방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지난 여름이후 처음보는 손녀가 귀여워서인지 가까이 하려 했지만 안아보지도 못하고 얼굴만 손가락으로 간지러 보였다. 나는 딸아이의 재롱을 채근하며 조금의 위로를 더 하려 했다. 낯을 조금 가리는 딸아이였지만 모처럼 이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재롱을 부려 어머니를 즐겁게 해 주었다.
내가 마중을 나갔다 오는 동안 어머니와 누나는 나를 처가집에 보내려 말을 맞추었던 모양이었다. 부산에 온지 열흘이 넘도록 처가집에 한번 못가본 나에 대한 어머니의 배려이었을 것이다.
순간 머뭇거렸지만, 어머니의 원대로 딸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처가에 가마고 병원을 나섰다.
- 2001년 12월 25일 불.
아침에 눈을 뜨니 함박눈이 오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눈을 보기가 힘이 드는데,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때맞추어 눈이 내리다니... 어머니께서 창밖으로 이 눈을 보고 계실까...
눈때문에 길바닥이 몹시도 미끄러워 감기 기운이 있는 딸아이와 아내를 처가에 두고 홀로 병원으로 나섰다.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전철을 타고 가다 병원을 지나쳐 다시 반대방향의 전철을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그사이 울산에 있는 형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또 딸아이를 데리고 올줄 알고 기다리셨나보다. 얼굴과 머리가 아주 단정한 차림이었는데, 나홀로 병실로 들어서니 좀 서운한 기색이셨다.
형에게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고, 내일쯤 1인실로 옮겨 모시자고 했더니 형도 모레부터 휴가를 내어 곁을 지키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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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늦은 점심을 같이 했다. 내가 싸주는 김밥을 드시고, 내가 이빨로 잘라놓은 무우김치를 드시고, 내가 집은 반찬을 드셨다. 내가 집에서 우리 딸아이와 밥 먹을 때 하는 행동이랑 똑 같은 것들이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되시다니...
잘 넘어가던 찰밥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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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처방으로 나왔던 약의 포장을 보니 고칼륨혈증억제제라고 씌여 있었다. 고칼륨혈증이란 근육의 마비로 손발이 저리고 다리가 무거우며 혈압이 떨어지고, 부정맥 등의 심장장애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세포내에 있는 칼륨의 수치가 높아진 것을 말한다. 칼륨이나 나트륨등의 전해질은 땀과 소변으로 배출되는데, 신장기능의 이상으로 칼륨이 배출되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도 한다. 응급대책으로 인슐린과 포도당을 주사하여 세포내에서 칼륨을 제거해야 하는데, 아마도 어제 처방된 주사병안에 든 포도당과 인슐린이 그것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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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부산에 있는 조카들이 다녀갔다. 이미 할머니의 죽음을 눈치채었을까...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이 어머니의 빰에 뽀뽀를 해대며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누나는 차마 어머니곁을 떠날수 없다고 말했다. 이 밤을 아마 뜬 눈으로 지새우지 않을까 한다...
- 2001년 12월 26일 물.
밤새 어머니께서 잠을 제대로 주무시질 못했다. 하지만 눈빛은 어제부터 초롱초롱한 채이다. 아침부터 무척이나 기분이 좋으신 듯 했다.
그러나 몸은 그렇지 못했다. 아침 9시반경에 구토를 시작했다. 전날 저녁에 먹은 것들이 모조리 토사물로 나왔다. 그렇게 구토를 한 후 지칠 법도 한데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양 팔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 주사바늘은 그 부은 팔에 꽂혀 있지만 주사액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후 들면서 주사바늘을 반대편 팔에 꽂았지만 주사액이 들어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께서 떡과 과자가 눈앞에서 둥둥 떠다닌다며 나와 누나에게 먼저 농을 걸었다. 누나가 단박에 달려가 절편과 과자를 사왔다. 절편 한덩이를 맛있게 드시고 '오늘 식사는 이걸로 끝이다...'시며 편안한 웃음으로 오후 내내 주무셨다.
오후들어 그저께의 처방과 같은 모양의 주사병이 하나더 추가되었다. 자세히 보니 50%의 포도당과 인슐린이었다. 보통의 링거액이 5%의 포도당인데 비해 10배나 농도가 짙은 것이었다. 세포내의 칼륨을 제거하기 위한 인슐린과 포도당인지라 재처방이 내려진 것을 보면 그만큼 칼륨수치가 아직 덜 떨어진 모양이었다.
담당의사인 최선생을 찾아 혈액검사결과가 어떻느냐며 현재의 상태를 물었다. 처방이 조금은 듣는 듯 하지만 아직 원하는 수치가 나오지 않아 오늘도 주사병이 투입되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전해질이 불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어 그 불균형으로 인한 증세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 불균형으로 인한 증세는 부정맥 또는 탈수현상과 같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저녁께에 서울에 사는 작은 누나가 병원엘 왔다. 어머니께 드시게 하려고 이것저것을 잔뜩 꾸려왔다. 초롱초롱한 어머니의 눈망울을 보며 안도하는 한편, 나에게서 현재의 상태를 전해들은 누나가 낙담끝에 홀로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누나들과 내가 침대를 둘러싸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는 기분이 더 좋아지시나 보다. 또 다른 것들이 드시고 싶으신지 하나둘 열거를 해가며 드시고 싶다셨다. 내일은 삼겹살 구운 것을 먹을 방도를 찾아보자며 다함께 웃었다.
작은 누나가 수고한 간병인들에게 휴가를 주겠다며 자기가 병실을 지키겠다고 한다. 여전히 불안해 하는 큰 누나도 모처럼 집에갈 채비를 하였으나 아침부터 한기를 느끼던 누나가 간이침대에 드러누웠다. 나에게 감기약을 사다 달라고 했다.
이러다 환자 더 늘어나겠다며 또 한바탕 농을 걸며 웃었다.
- 2001년 12월 27일 나무.
간밤을 처가에서 지내고 병실로 아침일찍 돌아와보니 어머니의 눈주위가 유난스레 시꺼멓게 보였다. 간밤에 화장실도 가시지 않고 잠도 잘 주무셨다는데, 내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닌지... 새벽에 주사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새로운 주사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양팔이 너무 부은 탓에 주사바늘을 제대로 꽂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하릴없이 오른쪽 발등에다 주사 바늘을 꽂은 채로 주무시고 계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더욱더 큰 그늘이 보이다니...
발등에라도 주사를 꽂을 수 없을 만큼 계속 부어 오른다면 어깨죽지에 구멍을 뚫어 주사를 직접 꽂아야 된다고 한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주사때문에 저렇게 붓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때문에 또 몸에 구멍을 뚫다니...
회진을 할때 담당과장과 의사들에게 팔이 어제부터 너무 붓는다고 했더니 주사를 좀 줄여 보겠다고 한다. 어머니의 붓기가 지금의 병이 진행되는 것의 증세일까...
의문이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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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간호사들이 어머니께 잘 버텨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간호사들도 어느 정도 어머니의 병 진행상태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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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서 아침에 죽을 드시더니 점심때에는 큰누나가 사온 생선회를 드셨다. 큰누나는 본인이 아픔에도 불구, 어머니를 위해 생선회와 삼겹살을 사왔던 것이다. 어릴때 부터 집안의 온갖 궂은 일을 다했던 누나였는데,
이렇게 어머니 가시는 길까지 누나가 힘을 다하고 있다니 생각하니, 그동안 누나와 그의 가족에 대한 무관심에 또한번 죄책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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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서 나온 네 남매가 좁은 침대를 둘러싸고 앉아 있으니 어머니께서 언제 이랬던 적이 있었을까 하시며, 기분좋은 미소를 가지셨다. 주위에 있는 우리 네 남매도 그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너무나도 기분좋게 하루를 보내시는 어머니, 그러나 속으로는 더욱더 병이 깊어가는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더욱 아팠다.
- 2001년 12월 28일 쇠.
새벽에 또 심한 구토가 이어졌다.
어머니께서 외견상 보기가 좋아 주말쯤에 1인실로 옮길까 하였는데, 새벽의 연이은 구토를 보던 누나와 나, 형이 당장 1인실로 옮기자고 합의를 했다.
아침이 되도록 심한 구토를 세번이나 하였지만 여전히 어머닌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다. 네 남매, 당신의 자식들이 자리를 뜨질 않고 주위에 머물러 있는 것 만으로도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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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이 끝난 뒤, 담당 간호사에게 병실을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현재 비어 있는 1인실은 26호와 41호. 며칠전부터 병실을 옮기기 위해 1인실과 2인실의 위치와 방상태를 계속 알아두고 있었다. 아침에는 형과 같이 11층 B동 병동을 쭈욱 돌아보며 41호가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다. 26호는 간호사실에 가깝긴 하지만 경관이 답답하여 어머니께 갑갑한 기분만 더해줄것 같았고, 41호는 뒤의 야트막한 동산이 침대에서 바로 보이는, 정결한 방이었던 까닭에 담당 간호사에게 41호실로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한 뒤 병실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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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딸아이와 아내가 옮긴 병실로 찾아왔다. 어머니께서 가뜩이나 좋은 기분에 손자의 재롱을 보며 더 기뻐하셨다. 그것이 얼굴에 드러나는지 병실을 드나드는 간호사들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얼굴이 좋다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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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주사를 줄이겠다던 담당의사가 말을 했었는데 정작 오늘에야 주사제가 1/4로 줄었다. 영양제 1리터짜리는 그대로 둔채 링거액 1리터짜리 두개가 500미리리터 하나로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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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접어 들면서 어머니께서 통증을 호소하는 간격이 세시간 정도로 좁아졌다. 몇차례 간호사들에게 주사를 놔 달라고 하다가 담당의사의 소견을 들어보고자 그를 만났다. 현재 가슴에 붙어 있는 패치가 진통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 들어 저렇게 통증이 자주 오는 것 같다는 말을 했더니 의사는 저만큼이라도 어머니께서 참아내고 계신 것이지 시간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얼마만한 고통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자식으로서 참담함이 더했다.
- 2001년 12월 29일 흙.
의사의 말처럼 어머니께서는 혼자만의 아픔을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나와 형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하고 보니 뿔뿔이 흩어져 살던 식구가 오랜만에 모여 모처럼만의 가족애가 싹트는 듯 여겨지는데, 어머니께서는 서너시간 간격으로 고통을 호소하시면서도 온종일 기쁜 미소로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은 병원에 다시 입원한지 꼭 한달째 되는 날이며, 형의 생일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생신을 열흘 앞둔 날이기도 하다. 가시는 마당에 언제까지 라는 단서가 무에 필요할까만은 올해까지만 살아주신다면 소원이 없을것 같았던 바램이 이제 어머니생신까지만, 그리고 음력설까지만 살아 주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바뀌는 것 같다.
...
아침에 회진이 있은 후 이제 어머니께서 식사도 곧잘 하고 하니 (물론 구토를 수반하지만...) 주사약을 다 제거하고 식사와 경구약으로 대체해보자고 의사들이 이야기했다. 이로써 입원후 한달만에 주사를 떼기는 떼어냈는데, 주사를 떼어낸다는 것이 어머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더이상 가망성이 없다는 것인지 사람을 헛갈리게 만들었다.
그러한 건 누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차라리 어머니의 회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머니의 구토로 경구약이 제대로 약기능이나 해낼지, 정말 이제 병원에서 할 일은 다 한 것인지, 누나도 내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할 지 모르겠다며 말했다.
- 2001년 12월 30일 해.
주사바늘을 다 빼고나니 어머니께서 한결 몸이 가벼워지신것 같다고 하셨다. 퉁퉁 불어 있던 팔은 다소 붓기가 빠져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부어 있었다. 진통간격은 여섯시간 정도.
오늘은 구토도 하지 않으셨다.
...
네남매가 함께 모여 같이 밤을 지새며 간병을 하는 것을 보고 간호사실에서 신기하다는 듯 수군거리는 소리를 엿들었다.
병을 앓는 이와 간병하는 이, 그리고 문병하는 이들의 관계를 오늘같은 일요일이면 부쩍 느끼게 된다. 지난 22,23일은 크리스마스같은 징검다리가 끼어서 문병/간병하는 이들이 놀러를 갔는지 병원이 텅비어 보였고, 오늘 같은 날도 연말과 신정연휴가 징검다리로 끼어 문병/간병하는 이들이 적다. 일요일이면 퇴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병이 나을라치면 토요일에 기를 쓰고 퇴원을 하려 한다. 더더구나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이 즈음에랴... 그런 조금은 한가한 병실에 복닥복닥 모여앉아 잠을 자고 식사를 같이 하며 어머니곁에 있는 우리 네 남매가 어찌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랴.
- 2001년 12월 31일 달.
오늘따라 어머니의 통증을 호소하는 간격이 잦았다. 새벽과 아침에 진통제를 맞은 이후 세시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진통제를 달라고 하셨다. 사흘마다 가슴에 붙이는 진통제인 Durogesic을 붙였음에도 어머니께서는 연신 통증에 고통스러워 하셨다.
점심무렵, 간호사가 어댑터를 사놓으라고 했다. 어댑터라는 것은 매번 주사제 투약이 있을 때 링거를 꽂기 위해 주사를 새로 찌르지 않고 하나의 주사바늘을 꽂아놓고 다음번에 투약할때에는 그 꽂혀진 주사바늘을 이용해 주사하기 위한 보조의료기였다.
어머니는 그제 까지만 하더라도 24시간 링거를 꽂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어댑터가 필요없었는데, 갑자기 어댑터를 사놓으라고 하는 것은 short time으로 주사제 투약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되는 셈이었다. 아침에 채혈해 간 것에서 다른 투약 결과가 나온 것인지 궁금하였으나 담당의사가 보이지 않아 그 결과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침 회진시 담당과장이 또 가슴타진을 하였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6시경 어머니가 또 통증을 호소하여 진통제를 청하기 위해 간호사실을 찾았더니 어댑터를 사놓았느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했더니 어댑터를 써서 진통제를 투약하겠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병실에 나타난 간호사는 링거가 아닌 그냥 주사만 들고 왔다. 퉁퉁 부어 있는 팔과 다리에서 한참이나 혈관을 찾던 간호사가 드디어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고 어댑터를 대었다. 그리고는 어댑터에 진통제를 주사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간호사가 싱긋 웃으며, 어머니께서 너무 엉덩이 주사(진통제)를 많이 맞아 엉덩이에 더이상 놓을 수도 없고, 그만큼 진통제 효과가 떨어져 직접 혈관에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진통제 때문에 이미 벌집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엉덩이가 순간 눈앞을 스쳐가고, 이제 혈관에 직접 진통제를 투여해야만 하는 신세가 된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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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께에 한해의 행복을 기원해 주는 전화가 몇 통 왔다. 하루동안 어머니의 통증때문에 정신이 없어 나를 위해 생각해주는 이들을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 준 이들이 고마웠다.
- 2002년 1월 1일 불.
혈관에 직접 투여한 진통제가 조금 효력을 보는 것일까, 진통간격이 너댓시간 정도로 늘어 났다. 예전보다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제보다는 한결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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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작은 이모가 어머니를 위해 생선회를 잔뜩 사오더니, 오늘은 고모가 어머니가 먹고 싶으시다시던 잡채를 보온통에 넣어 따뜻하게 해서 가져왔다. 최근들어 유난히 식탐을 하시는 어머니께서 보는 사람마다 무엇이 먹고 싶으시다는 때가 부쩍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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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옴에도 여느 해와는 달리 올해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보리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채 새해의 첫날을 맞았다.
그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보기에는 현재의 난 여유가 없는 듯 하다.
- 2002년 1월 2일 물.
지난밤 11시에 진통제를 맞고난 뒤 아침 8시가 되어 진통제를 맞으셨다. 얼굴은 어제보다 더 좋지 않은 듯 느껴졌다. 아침 회진시 담당과장이 퇴원해도 되겠다고 농반진반의 말을 했다.
어머니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난 다음에 병실을 찾는 사람에게마다 곧 퇴원할 거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이내 통증은 세시간 간격이 채 못되도록 찾아왔고 오후 3시경에는 평소의 양보다 배정도 되는 양의 진통제를 맞았다.
푸석한 얼굴의 미소는 가지고 계시지만 그 얼굴을 보는 나와 누나는 얼굴이 전보다 못해져간다는 것을 같이 느끼는 듯 했다.
오후에 담당의사를 만나 아침에 과장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현재 어머니께 병원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진통제를 투여하는 일 밖에는 없고, 진통제를 경구투약 할 수만 있다면 퇴원도 가능하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경구투약은 혈관에 진통제를 직접 투여하는 것 보다는 더디 효과를 낼 것이고, 구토를 수반할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이틀쯤 경구투약해 보고 경과를 본뒤 결정하자고 했다.
퇴원이라는 말은 병을 모르고 계신 어머니께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이겠지만, 더이상 병을 낫게 한다거나 진행속도를 늦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오히려 어머니의 통증만 더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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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어머니께서는 주무시기만 하셨다. 링거도, 영양제도 다 떼어버린 터라 오히려 기력이 더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목이 부어올라 호흡을 하실 때 마다 코고는 듯한 소리를 하며 주무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더 푸석해 보인다.
- 2002년 1월 3일 나무.
새벽에 두번에 걸쳐 진통제 주사가 있은 후 아침 8시에 경구투약용 진통제가 나왔다. 겉면에 씌어져 있기로는 M S Contin 30 mg. 오늘 회진에도 사람좋아보이는 인상을 가진 담당과장은 이틀쯤 뒤에 퇴원해도 괜찮겠다며 어머니의 등을 토닥거리곤 30초도 못되어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 사람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이제 헛갈린다.
진통제를 드신 후 어머니께서는 내내 기력을 잃고 주무시기만 하셨다. 점심을 드시려 일어나신 어머니께서 며칠간 없었던 구토를 시작했다. 아침거리가 입으로 다 쏟아져 나왔다.
잠시 앉아 계시던 어머니께서 약을 먹기 위해 약간의 점심을 드시곤 곧 잠에 빠져 드셨다. 두어시나 되었을까... 어머니께서 눈을 감고는 작은 누나의 이름을 부른다. 서울에 가있는 작은 누나는 왜 찾을까...하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잠꼬대려니 짐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참을 마치 작은 누나를 바로 앞에 둔 듯 말을 건넸고, 나와 누나는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지켜 봤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눈을 뜨시며 좀 일어나 앉자고 하시며 내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를 바로 앉혀 드리니 눈앞에 헛것이 보이며, 머리가 휑한듯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도대체 진통제가 어떤 성분이기에 저런 환각을 보셨을까 싶었다.
몰래 병실을 빠져나와 병동 한켠에 있는 PC를 이용해 찾아보니 어머니께서 드신 진통제는 마약성분이 들어 있는 몰핀이었다. 현재 가슴에 붙어 있는 듀로제식도 마약성분이 들어 있는 진통제였던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밖에 통증을 가라앉히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나니 착잡해진 기분을 어쩔수 없었다.
...
연휴가 다 끝났는지 한동안 조용하던 병원이 다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맘은 왜 이다지도 허전한 것인지...
- 2002년 1월 4일 쇠.
어머니의 구토가 심해졌다. 어제 처음 투여된 몰핀의 부작용으로 인한 구토였다. 아침식사를 하신후 다시 몰핀과 그외 약을 먹고 난 뒤 곧이어 토사가 시작되고 같이 복용한 약이 모양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약에 취하신 듯 오전내내 주무시기만 했다.
어제 혈액검사의 결과가 좋지 않아서일까. 아침에 또다시 링거와 그외 주사액이 담겨진 약물이 처방되었고, 어머니의 발에 꽂혔다. 투약된 것은 포타슘 클로라이드, 황화마그네슘, 글루코산 칼슘.
또다시 세포내 전해질의 불균형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기가 두렵다시던 어머니께서 점심때에는 오렌지쥬스만 드셨다. 하지만 10분도 못되어 드신 만큼의 양을 그대로 뱉어 내셨다. 저녁식사도 마찬가지였다.
담당의를 만나 어머니의 구토를 이야기했다. 내일은 알약으로 항구토제를 투여하겠다고 한다. 퇴원한 후 가족과 함께 어머니의 얼마남지 않은 여생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음주 화요일이 어머니의 생신. 어머니께 이번 일요일에 가족들이 다 모일테니 생일상을 앞당겨서 받자고 했더니 어머니께서도 좋다고 하셨다. 그 생일상을 물리시고 난 다음, 이제야 어머니께 정확한 병명과 현재의 상태를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자식으로서야 어머니께서 다른 걱정않도록 여태 병의 상태와 경과를 숨겨왔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로서 여생을 정리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당신의 권리행사이지 않을까 싶다.
- 2002년 1월 5일 흙.
항구토제가 같이 투여되다.
저녁께에 통증때문에 진통제가 별도 주사제로 투여되다.
- 2002년 1월 6일 해.
새벽에 별도 진통제를 맞다.
진통제가 바뀌다.
저녁께에 또 진통제를 맞다.
- 2002년 1월 9일 물. 어머니 부산 집으로 모시다.
- 2002년 2월.
운전면허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 운전면허가 필요하지 않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이제서야 운전면허를 따려고 한 것은 지난 부산 간병 때 어머니께서 '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멀리 가고 싶다'며 지나가듯 말씀하신 것이 계속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운전석에 앉아 교육을 받는데, 마침 나이 지긋하신 분이 옆에 앉아 지도를 해 주었다. 내가 조수경력만 15년 정도이다보니 웬만한 운전은 할수 있었다. 그래도 자만하지 않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감안한채 천천히 S자 코스를 유유히 통과해 나오니 네게 이런저런 이력을 질문하시더니 그 분께서 한마디 하신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급한것 같아요... 선생님처럼 바삐 살다가 운전면허라는 것도 지나쳐 버린 사람이 있는가 반면 채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면허따려고 학원부터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또 제가 조금 느릿느릿 가리키다 보니 성질급한 사람들은 지난 코스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다른 코스를 먼저 하려고 해요. 학원에서는 브레이크만 밟으면 되는데, 사람들은 엑셀레이터를 그렇게도 밟고 싶은가 봐요. 그러다 사고나죠... 밖에 나가서 사고치면 다행인데, 학원에서도 종종 사고가 난답니다... 왜 그리 성질이 급한지..."
Adagio가 필요했다.
...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먼저 앞섰지만, 다른 회사를 알아보다 면접을 했다. 면접을 보던 대표께 어머니께서 현재 위중해서 입사일자를 제대로 확인해 드릴 수가 없다고 했다. 합격했다.
- 2002년 2월 23일. 운전면허 기능시험 통과.
- 2002년 3월 1일 ~ 3월 3일. 어머니의 상태 이상으로 부산을 다녀오다. 회사에서 언제 출근할 수 있냐는 전화가 왔다. 2주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 2002년 3월 6일. 기능 테스트에 합격한 뒤로, 학원에 사람이 너무 밀려 시험날짜를 잡지 못하다가 도로주행 테스트 통과.
어머니를 태워 드릴 수 있을까.
- 2002년 3월 8일 쇠. 마지막 부산행…
- 2002년 3월 14일 저녁 8시 30분 어머니 운명하시다.
그동안 가뭄으로 메말라 있던 땅을 적셔주려는 듯 많은 비가 쏟아졌다. 모처럼 목욕을 갔던 누나는 그 비를 맞으며 병실로 돌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숨소리가 작아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어머니의 숨소리가 예전처럼 거세어졌다. 어머니는 목이 부어 있는 상태이고 입으로 호흡을 하는 탓에 숨소리가 마치 코를 고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조금은 힘차 보이는 듯한 소리에 다소의 안도를 했다.
누나가 모처럼의 목욕을 했듯 나도 병실에 마련된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누나가 목욕으로 약간의 긴장을 풀어서일까, 평소 눈도 잘 못 붙이더니 낮잠을 꽤 잤다. 나는 예전과 달리 간밤에 단잠을 잤던 터라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께서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마약성 주사를 맞고 있는터라 제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제정신이 돌아와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2,3초 뒤면 다시 환각에 빠져들었다.
며칠전부터 어머니께서는 가끔 "엄마, 엄마..."하며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환각속에서 찾고 계셨다. 그때쯤이면 진통제를 한대 더 놓아드려야 했다. 환각상태에서 아프다고 느끼시는 것인지, 진짜 통증인지 가끔 구분이 가질 않아 눈을 감고 아프다고 흐느끼실때면 잠시 시간을 두어 어머니를 지켜보고, 계속 통증을 호소하시면 하릴없이 간호사를 불러 진통제를 놓아야 했다. 어머니 몸에는 패치형태의 마약성 진통제가 3개나 붙어 있고, 왼쪽 어깨죽지를 뚫어 직접 정맥에 진통제가 수시로 흘러 들어가도록 해 놓았는데도 서너시간 간격으로 좀더 많은 양의 진통제를 주사하여야만 했다.
며칠전부터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니는 그 꿈속에서 아기로 돌아간듯 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부르며 "엄마, 다리 만져줘, 다리가 아파..."하시는 등, 그 환각속에서 외할머니와 같이 계신듯 여겨졌다. 가끔 누나가 어머니를 깨워 지금 옆에 누가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도 봤다. 어머니께서는 누나와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아신다고 했지만, 전날부터는 계속 외할머니만을 찾았다.
사흘전부터인가 어머니께서 드시는 음식도 없었는데, 갑자기 대변을 보시기 시작했다. 일어설 기력도 없던 터라 누나가 기저귀를 갈아대며 변을 받아내었다. 입을 계속 열어둔 채로 누워 계셔서인지 입안이 말라 갈라져서 피가 내비치기도 했다. 누나는 간호사에게 가제를 조금얻어 물을 묻히고 어머니 입술을 닦아 내었지만 한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어머니 입술은 배어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오후 여섯시가 다되었을 무렵, 울산에 있는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차하면 달려올려고 하는 마음을 전화를 통해 느꼈지만, 이틀을 내리 병실을 지켰던 형에게 '오늘은 어머니 목소리에 힘도 있고 하니 그냥 있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저녁무렵, 어렸을 때 한집에 살면서 어머니께 많은 정을 받았던 먼 친척형이 문병을 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친척형을 알아보지 못했다. 형은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근 며칠동안 의사의 말에 따라 주변 사람들이 많이 문병을 왔지만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모든 사람들이 오열하는 것을 봐 왔던 터라 나는 모른척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 아니,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 봤던 것 같다. 형은 행여 어머니 정신이 들까 한동안 자리를 지켰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긴 한숨과 함께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봐야겠다고 병실을 나섰다.
식사를 놓쳤던 터라 누나와 나는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까 잠시 고민하다 김밥을 주문했다. 누워계신 어머니를 두고 따로 저녁을 먹는게 조금은 언짢았지만 잠시라도 병실을 비울수 없는 노릇이라 어쩔수가 없었다.
배달된 김밥과 어묵을 먹는 동안 어머니는 여전히 거친 숨소리를 내시며 누워 계셨다. 꽤 많은 양의 김밥을 먹었는지, 누나와 나는 서로 배불러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담배를 한대 필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예전같으면 병실 바로 옆에 있는 계단쪽에서 담배를 폈는데, 그날 따라 1층까지 내려가 병원 현관앞에서 바람을 쐬며 비구경을 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다시 11층 병실로 돌아오니 누나가 어머니 옆에 서 있었다. 누나가 어머니 입술을 물로 적셔주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서는 나를 누나가 돌아보며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했다. 곁에 다가서서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의 얼굴이 많이 창백해져 있었고, 거친 숨소리 대신 제대로 호흡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볼수 있었다.
어머니를 흔들었다. 흔들때마다 어머니는 작은 숨을 쉬셨지만 이내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누나가 간호사실로 뛰어가는 동안 나는 어머니를 계속 흔들었다. 그사이 형에게도 전화를 한 것 같다. 조금 있다 간호사와 의사가 뛰어 왔고 어머니의 호흡을 살폈다. 간호사가 심장박동을 측정하는 기계를 가지러 가는 동안 의사가 어머니를 살피더니 심장이 멈췄다고 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눈에는 분명히 어머니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기계를 가져왔고 어머니의 심장에 연결하자 모니터의 화면에는 두번 출렁이는 곡선이 보이더니 곧 수평선이 나타났다. 곧 담당의사가 호출을 받았는지 뛰어왔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며
'8시 30분에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말을 했다.
...
어머니께서는 많은 것을 주시고 돌아가셨다.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사랑이 무언지 가르쳐 주셨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비를 주셨고, 자식들에게 휴식을 주셨고, 저녁식사까지 편하게 먹을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렇게 가시는 어머니께 나는 더이상 드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2~3주가 지날 때까지 여전히 정신이 멍했다. 무언가 새로이 시작하여야 하는데도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어머니의 그 크신 사랑을 깨우쳐 주셨는데, 나는 그 사랑에 보답을 할 수 없기에 나의 무기력을 더더욱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결국 내가 운전하는 차에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다.
...
장례기간 중 면접을 보았던 회사에서 다시 출근가능날짜를 물어왔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즉답을 못했다.
- 2002년 3월 28일 나무.
아직 어머니를 보낸 것에 대한 자책에서 완전히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런 무기력이 더이상 오래 가지 않아야 할텐데, 아직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길가를 걸어가다 Beatles의 Let it be를 Leo Sayer의 목소리로 듣게 되었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어머니께서 이런 자식의 무기력함을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가 가시고 없음을 이제 현실로 받아들이고 남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로서의 삶을 또 살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동안 밀쳐두었던 숙제들이 생각이 나지만, 그것에 쉽게 다가설수 없음에 또 한편 좌절했지만, 이제 남은 내 생을 더욱 열심히 사는 것이 어머니의 진정한 마음이라 여겨졌다.
우연히도 Leo Sayer의 Let it be가 들어 있는 앨범의 제목이 "Show must go on".
인생이 잠시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육체라는 탈을 쓰고 벌이는 연극이라면 나도 "Show"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2002년 4월 1일 달. 새 직장으로 출근하다.
어머니의 별세 이전부터 결정된 입사였지만, 조금 시간을 두어 미루었던 것이었는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뒤 조금은 정신이 아득하고 멍한 기분이었지만, 그 아픔을 떨쳐 내고자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을 하기로 했다.
모처럼 새벽공기를 맡으며 집을 나서는 기분은 여느때와는 많이 달랐다. 아니, 외려 너무 오랜만이어서 조금은 생경해진 듯해서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타보는 새벽 전철. 내가 한동안 출근이라는 단어를 잊고 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새벽전철을 타고 출근을 했던 모양이다. 부평에서 출발하던 용산행 직통 전철이 어느새 주안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용산행 직통 전철을 타고 신도림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사람들은 앉아 가기 위해서 긴 줄을 서서 신도림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사람들은 순환선을 그냥 타고 가지만,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와 조금은 쉬어 가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신도림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기다리곤 한다. 열차에 타자마자 자리에 앉아 이내 잠에 빠져 들곤하는 얼굴들을, 평소에는 나도 눈을 감았지만, 첫 출근날은 그러질 못하고. 그냥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예전 직장이 삼성동에 있었던 터라 내리기 까지에는 십여분의 여유가 더 있었는데, 새 직장이 서초동에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지나칠 뻔 했다. 허둥지둥 서초역에 내려서 뚜벅뚜벅 새 직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기분이 묘했다. 분명 새로운 것을 향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인데,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못한 것은 왜인지...
- 2002년 4월 27일 흙.
일요일에 어머니께서 남긴 네 남매가 부산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하루 먼저 도착해서 토요일날 일찍 어머니를 모셔둔 영락공원을 다녀왔다. 어머니를 뵙고 약간은 우울해진 마음으로 전철을 타기 위해 범어사역까지 걸어나왔다. 걸어서 10여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보니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길가에는 채 한평도 되지 않는 무덤들이 연이어져 있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속에 자리잡은 공동묘지들이 이상하리만치 평안한 느낌을 주었다. 바람이 불어 하늘은 더 푸르고, 길가에 허드러진 철쭉은 그다지도 아름다운데 이 땅에 더이상 계시지 않는 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어머니를 부르고 싶어도 어머니는 더 이상 대답하실 수 없고, 다만 온화한 미소로 내 맘속에만 남아 있다. 그런 어머니는 저 하늘에도, 저 철쭉 한송이 한송이에도 계신 듯한데 한참을 걸어나오다 보니 어디선가 목탁과 염불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정표에는 어떤 절을 가르키고 있었고, 그 곳에서 아주 작은 소리의 메아리가 들렸다. 이름모를 새소리도 들리고, 이름모를 나무들도 새롭게 솟아나는 싱싱함을 자랑했다. 마치 인간이 살지 않는 낙원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속에서도 여전히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로 서 있는 듯 했다.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어서니 웅장한 금정산과 그 아래에 무수한 아파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고개는 마치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은 듯 했다. 자동차 소리와 경적소리, 무수한 사람들 소리, 일상에서 늘 듣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모습들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다 보니 어느덧 내가 걸어왔던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미소는 늘 내 시선 너머에 걸려 있는 듯 했다.
- 2002년 5월 8일 물.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딸아이가 가만히 내 손을 이끌며 제 플라스틱 미니 책상으로 데려갔다. 내게 앉아 보라며 말을 하고는 무언가를 집어서 내 왼쪽 가슴에다 갖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