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의 온도 Oct 20. 2022

벚꽃이 흩날리던, 첫 봄의 사랑




 고 3, 수능이 끝나고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여고 중창단이었던 나는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던 주말 오후, 남고의 음악실에 있었다.

친한 중창단이었던 남고 아이들이 졸업발표회를 하는데, 합동무대를 하게 되어 함께 모여 연습하는 날이었다.


“우리 학교 선배가 노래하는 거 봐주러 오실 거야.”


졸업생 선배가 노래를 봐주는 일이 낯설지 않았던 시절,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샘솟을 때쯤.


 ‘뚜벅, 뚜벅,,’


누군가 복도 쪽 창문으로 어슴푸레 보였다.

음악실 문을 열고 선배가 들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조금 마른듯한, 청바지에 긴 야상을 걸친 순해 보이는 남자. 왜 그랬을까? 지나고 나니 알 수 없는 열아홉의 설렘이었겠지만, 선배가 보이기 시작한 복도 창문 밖에서부터 음악실 안까지, 핑크빛 벚꽃이 반짝이며 휘날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분명 그런 장면을 내 눈이 담아냈다.

그리고 연습하는 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의 설렘보다 앞으로 이 사람을 더 볼 수 있을까가 더 중요했고, 마음이 초조했다.


“선배, 공연하는 날 오시는 거죠?”

“응. 아마 스텝으로 참여할 것 같아.”


다행이다, 공연 날에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니. 그런데 다시 봐도 설레려나..


남고 중창단 아이들의 졸업발표회 날이다.

큰 회관을 빌려하는 공연, 저기 헤드폰을 쓰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진행요원이었다. 무대의 동선을 체크해주고, 대기하는 복도에서 함께했다.


”오른쪽으로 좀 더, 응 오케이.“


오전부터 이어진 리허설이 끝나고 오후 늦게 공연이 시작되었다.

남고 아이들의 무대들, 우리 중창단의 노래와, 합동무대, 그리고 개별 무대까지 서툴지만 알찼던 공연이 끝나고, 선후배들이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물론 우리도 함께.

이제 더 이상의 만남은 없겠구나 생각하니 아쉽고 슬픈, 마지막. 하지만 이대로 내 첫사랑을 시도조차 못한 채 그만둘 수는 없었다.


2차 장소로 이동하는 길. 선배가 신호등 아래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분명 후회할 거야.’


무슨 용기였을까, 이제 곧 대학생이 되는 패기, 뭐 그런 거였을까.


“선배,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어?”


 나의 당돌하고 신선한 고백에 선배는 흔쾌히(?) 번호를 주었고, 우리는 각자 2차 장소로 흩어졌다.

동갑내기들끼리, 선배들끼리. 각자의 장소에서 있었지만, 난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뭐라고 문자를 해볼까..’


용기 내어 받은 전화번호임에도, 연락하자니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는다.

다음날 학교에서 내내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던 난, 집에 갈 때까지 휴대폰만 바라보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었다.

종일 그의 이야기로 물든 하루, 하굣길의 친구에게도 이 난제를 공유하던 그때, 지하도를 내려가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어제는 잘 들어갔니? 속은 괜찮아?”


나에게 단답형 이상의 답을 얻기 위한 물음, 이건 분명 그린라이트였다.

그렇게 남의 학교 선배는 나의 오빠가 되었고, 연인이 되었다. 20살이 아닌 스무 살의 첫사랑이었다.


“나.. 그런데, 4월에 군대를 가. 그래서 만나자는 말을 못 하겠어.”


예상치 못한 전개에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첫사랑이라 가능했을 시나리오였다.

지금 당장 이렇게 설레고 예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군대가 별거였을까.

괜찮았다. 안 괜찮았지만, 괜찮았다.


“그럼.. 두 달 정도 남은 거네? 아, 40일.. 그럼 40일 동안 매일 만나면 되겠다.”


정말 매일같이 만났다. 가족들도 함께, 친구도 함께. 참 순수하고 예뻤던 사랑이다.

그렇게 군대를 가고 100일 만에 휴가를 나왔을 때도, 6개월 뒤에 남자 친구의 부모님과 첫 면회를 갔을 때도 설레고 행복했다. 편지를 쓰고, 짧은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그때.


‘하필이면 해병대를 가서 휴가도 어렵다니.’


가끔 내 남자 친구를 데려간 나라가 원망스러웠을 때도 있었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꼬박꼬박 잘 흘러갔고, 1년여를 보냈다.

활활 타오르는 불씨는 금세 꺼진다고 했던가.

나의 첫사랑은 역시나 버텨내기 힘들다는 일말 상초(일병 말 상병 초, 흔히들 연인이 헤어지는 시기)를 넘기지 못했고, 1년 2개월의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두 달, 짧은 만남의 신뢰를 이겨내기엔 2년은 물리적으로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이별 후 첫 휴가, 그의 전화를 나는 받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냉정한 사람이었고, 혼자 꽤 오랫동안 이별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전과 같은 감정은 아닐 거다. 미안했다.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던 나로 인해, 혹시나 군생활을 망치진 않을지. 그럼에도 그는 자아가 단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러길 바랬다.





그리고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7년 후 어느 날, 엄마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에 왔었어.”


 엄마가 가게를 옮긴 지 3년쯤 되었을 때, 우연히 친구와 엄마 가게에 왔단다. 엄마 가게인지 모르고 왔겠지만, 새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반가웠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는데, 지금쯤 어디 관공서에서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종종 첫사랑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역시나 그 당시의 감정을 잘 알아주는 건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었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난 그 시절 소녀가 되어 있었다.


참 고마웠다.

평생 한 번뿐인 첫사랑의 떨림을, 그 순수함을 지켜준 사랑이어서.

나도, 그도 푸릇푸릇 새싹 같았던 예쁜 나이, 서로에게 충실히 서툴렀던 사랑이어서. 지금은 새삼 그가 참 고맙다.


벚꽃이 흩날리던 2009년의 봄.

나는 이 세상의 빛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열아홉 늦은 사춘기의 소녀였다.






#남편님눈감아주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숫자로 물드는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