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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온도 Oct 17. 2022

숫자로 물드는 하루

연속혈당측정기와 함께




“딸깍”


눈곱도 채 떼지 않은 아침. 오늘은 어떤 손가락을 고를지 잠시 고민하며, 걔 중 가장 말랑한 녀석을 고른다. 병원 냄새를 전해주는 알코올 솜으로 채혈 바늘을 쓱 닦고, 잠깐의 고민 끝에 고른 손가락 끝도 닦아낸다.

쏙, 얼굴을 내민 벌건 핏방울을 깜빡이는 레이저 빛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혈당 체크지 위에 옮겨야 한다.


“126, 오늘은 좀 높네.”


스무 살의 끝자락부터 서른의 끝자락까지, 꼭 10년 동안 하루도 이 일과를 거른 적이 없었다.

채혈침의 세기는 1-5까지, 스무 살에 1단으로 시작했던 나의 손가락은 10년 사이 채혈침 3에도 핏방울을 내보이지 않을 만큼 두터워져 있었다.



일반인들의 공복혈당은 100 이하, 식후 혈당은 80-140 사이라고 한다면

당뇨인들은 보통 공복혈당은 120 이하, 식후 혈당 200 안쪽으로 관리한다.



매일 아침, 오늘의 하루 컨디션을 결정하는 공복혈당체크는 가장 떨리면서도 중요한 순간이다.

식전 혈당에 따라서 인슐린 주사량도 차이가 날 뿐더러,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혈당이 높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와 생각건대, 매 순간 혈당을 체크할 수 없었던 나의 20대는 아마 분명 고혈당과 저혈당을 넘나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혈당인 날들이 많았을 거다.

보통 아침 공복, 아니면 운동 전에만 혈당검사를 했기 때문에 식후 혈당은 어느 정도이니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피로감이나 목마름, 시야가 흐릿해지는 증상이 있으면 ‘지금쯤 고혈당이겠구나.’하는 생각만 했을 뿐.



하루는 외래진료를 갔다가 연속혈당측정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약간 큰 단추 같은 모양인데, 2주 정도 몸에 부착해놓고 있으면서 실시간으로 혈당을 확인할 수 있는 제품이에요.”

“와, 그럼 피검사로 측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

“맞아요. 금액대도 전보단 내려가서, 사용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저도 찾아볼게요.”



몸에 부착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씻을 때나 잘 때 불편하겠지만, 실시간으로 혈당을 체크할 수 있다면, 바쁘게 일하며 혈당관리를 저만치 미뤄뒀던 나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달 정도 사용하는데 15만 원…? 아무래도 안 되겠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만만치 않은 금액.

‘그래,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지 하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아니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난 조금 불안정했다. 안정적인 정규직이 아니었던 그때라 더 했는지도 모르겠다.


1형 당뇨로 사는 순간부터 돈이 없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3개월에 한 번 병원에 갈 때마다 들어가는 인슐린 값과 각종 검사비로 20만 원 이상 정도의 고정비가 있었고, 병원비 외에도 주사를 한번 놓을 때마다 들어가는 일회용인 펜니들(인슐린 주사기 바늘)과 알코올 솜, 혈당 측정 검사지 등.


“인슐린 살 돈만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거예요.”


예전에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에 나온 가수 비가 어머니에 대한 일화를 말하던 중 했던 말이, 내 일이 되고서야 진정 이해가 되었다.


스물셋부터 일을 했지만,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동안 2년 치 월급의 절반은식구들의 밀린 보험료를 내는데, 1년 치 급여와 퇴직금은 1년간의 고시생활에 쓰였다. 이후, 빈털터리가 되었던 내가 고시공부와 병행하려 입문했던 방문교사일은 고정수입이 아닌 일을 하는 만큼 벌이가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했었다. 물론 시험 준비는 첫 몇 개월 이후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회사에서 교육을 듣거나 또는 수업을 준비했고, 오후 2시 이후로는 수업을 나갔다. 저녁 10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


일 하는 만큼 돈을 번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잘 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나의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일 중독에 걸린지도 모른 채 움직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게 5년 차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싶었던 나에게 성과로 보상받는 일의 유혹은 참 달콤했다.

덕분에 일중독에 빠진 5년 동안 난, 건강에 대한 20대의 자만으로 혈당관리와 저만치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

.


“저 리브레 써보려고요.”

“잘 생각했어요! 소모성재료 처방전이 있으면 지원금이 있으니 전보다는 덜 부담될 거예요.”


마침 20년 말부터 1형 당뇨인들에게 적용된 희소식, 연속혈당측정기의 60% 이상의 비용을 지원해주는 사업이 시작되어 기기 사용에 대한 금전적인 부담이 줄어들었을 시기였다.

21년 3월, 근 3년간의 방문교사생활 끝에 교육회사 정규직 팀장이 된 지 1년, 어느새 서른이 돼버린 나. 전과 같지 않은 나의 컨디션에 덜컥 무서움이 앞섰던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인생의 동반자가 생긴 후로, 혼자의 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니 더욱 커진 아이에 대한 열망은 내 건강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20대 초반, 당뇨와 마주했던 그때부터 7년간 쉬지 않았던 운동습관으로 지난 4년을 버텨왔다는 걸, 그리고 다시 열심히 관리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연속혈당측정기는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씻거나, 잘 때 부착된 센서가 떨어질까 봐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휴대폰으로 5분에 한 번씩 혈당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이 작은 기기가 놀랍고도 감격스러워, 이런 작은 불편함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6.3 확실히 효과 좋네요."


3개월 뒤 7.5였던 내 당화혈색소는 무려 11년 만에 6%대로 내려왔다.

확실히 수치가 계속 눈에 보이니 주사를 더 놓거나, 음식관리에 힘쓸 수밖에 없어서,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어느덧 연속혈당측정기와 한 몸이 된지도 1년 반.

처음처럼 열심히는 아니지만, 하루하루 다른 그래프는 여전히 나에게 채찍질 중이다.

계산적인 삶이 싫은 내게 하루에도 몇 번씩 계산하는 삶을 살게 하는 숫자들.

참 정직한 이 숫자들을 보며 매일이 지난다.



오늘도 난 눈에 보이지 않는 혈당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준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좋은 걸 알지만 선뜻 사용하지 못했던 기기를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힘써주신 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소수의 일이기에 더 큰 힘을 모아야 했던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피, 땀, 눈물 덕분에

나는 오늘을 무사히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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