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증거, 자격증

물경력 탈출의 첫걸음

by 연두초록

입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업무가 소위 말하는 '물경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그 포지션에서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커리어 방향성과 맞는 것이 있을지 꾸준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내 역량과는 무관하게 조직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회사에서 수행하는 업무 외의 공인된 '증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격증이었다.


자격증이라니, 팁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회사를 다니면서 자격증을 따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격증을 따겠다고 본격적으로 결심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따야 하는데'라고 입으로만 말하는 사람은 한 트럭이다. 입으로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시작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나는 커리어 전환의 분야가 확실하게 있었으므로 일단 기본적인 관련 자격증 중 가장 따기 쉬운 자격증부터 시작했다. 정보처리기사였다.


주 3회, 퇴근 후 내일배움카드로 정보처리기사 과정이 있는 학원을 다녔다. 자격증에 따라서는 내일배움카드로 교육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찾아보기를 권한다. 주말에 약속이 없는 날에는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전체적인 공부 진도를 나갔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심지어 당시에 다니던 회사는 집에서 가까운 편이었던 것에 비해 학원은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강남역에 있었다. 자격증을 따고 나면 이 머나먼 통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동력으로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합격을 확인한 날 다시 강남역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정보처리기사처럼 진입 장벽이 낮은 자격증은 이직할 때 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사철 전공에 전공 관련 경력만 보유하고 있는 내가 공학자 성격에 가까운 데이터 분석가 분야로 커리어 전환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인된 '증거'가 필요했다. 이 '증거'는 추후 이직할 때 지원할 회사에 나를 증명하는 용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제시할 증거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공인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안심감과 자신감이 물경력의 불안함을 덜어주었다.


뿐만 아니다.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치고는 실제 면접에서도 면접관이 자격증 보유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련 지식을 갖고 있다는 입증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커리어에 관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성실함을 입증하는 측면이 더 크다. 커리어를 증명할 수 있는 공인된 성과가 있거나 커리어와 관련한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줄만한 콘텐츠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가장 접근성이 높은 입증 방법이 바로 자격증이다.


물경력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상황이 천차만별이고 원하는 커리어패스도 각양각색이다. 각자의 상황에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걸 모르니까 답답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을 법한 공인된 증거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기를 권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에는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설령 커리어패스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멘탈 관리나 지식 쌓기 등 간접적인 도움이 된다. 꼭 자격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성실성을 입증할 최소한의 공인된 '증거'를 만들어 두는 것부터, 물경력 탈출의 첫걸음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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