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물'이 아니게 된다
데이터 분석 분야로 커리어 전환을 하고 싶었다. 요새 떠오르는 직종이지만 진입이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대부분 관련 전공 석사 이상이나 관련 경력을 원한다. 관련 전공은커녕 가장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문사철 전공자에, 전공 관련 경력만 가지고 있는 내가 학원에서 프로그래밍이나 파이썬을 배운 교육 이력만으로 커리어 전환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기존 경력을 살려 데이터 서비스 기획 분야로 이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직의 상황상 내가 속한 부서에서 기획한 내용이 상용화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았다. 즉 기획자로서는 물경력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현재 하는 일이 물경력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회사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경우 당시 하던 업무와 내가 원하는 커리어가 아예 교집합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교집합의 부분에서 최대한 진지하고 깊이 파고들었다. 교집합을 찾고 늘려갔다.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도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많은 회사들이 그렇듯 당시 일하던 회사에서도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술 도입에 관심이 있었고, 관련 동향 모니터링 업무가 주어졌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업무였지만 전문성이 필요한가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가를 묻는다면 의문이 컸다. 시간이 많이 드는 업무였지만 전문성이 크게 요구되지는 않는, '물경력'스러운 업무 중 하나였다. 매출이나 성과에 직결되지 않으면서 시간은 많이 소요되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업무였다. 그래도 이왕 주어진 업무라면, 최대한 회사에도 나에게도 도움이 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언컨대 이 시기의 나는 우리나라에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비즈니스에 대한 기사를 가장 많이 읽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저 커리어의 관점에서만 볼 때보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모니터링할 때 더 현실적인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트렌드 모니터링을 그저 단순 업무로 여길 수도 있지만, 주어진 업무 내에서 최대한 비즈니스 관점을 유지하고 동향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영혼 있게'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속하다 보니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비즈니스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이런 눈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진 수확이었다.
데이터 관련 선행 연구나 시장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웹 정보가 필요할 경우가 종종 있었다. 데이터 분석을 배우기 전이었다면 일일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데이터를 복붙했겠지만, 크롤러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학원에서 파이썬을 배울 때 크롤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업무 활용을 위해서 해 본 적은 없었기에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몇 번의 경험을 거치면서 능숙해졌다. 크롤링에 익숙해진 것은 물론 업무 효율성 또한 크게 높아졌다. 아무도 나에게 크롤러를 만들어서 업무를 하기를 기대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다. 단지 원하는 커리어의 방향에 가까워지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방식이었다.
기획자로서 선행 연구를 진행할 때에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기술 논문을 찾아가면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떤 기술을 도입할 수 있을지 정보를 수집하고, 직접 적용해 보았다. 당시의 나는 파이썬 기초 문법을 겨우 학습한 정도였지만 끈기있게 공부하고 시도했고 유의미한 연구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때 데이터 분석에 필요한 지식과 문제 해결 능력을 엄청나게 단련할 수 있었고, 이 연구는 이후 이직할 때 대표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실제 서비스에 적용할 기술을 A to Z로 혼자서 연구하고 구현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배울 때와 실제 활용할 때의 과정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가령 데이터의 경우, 배울 때에는 거의 다 정제된 데이터를 가지고 공부한다. 하지만 실제 서비스에 활용하기 위한 데이터는 전혀 정제되어 있지 않다. 데이터 전처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식으로 전처리를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 또한 실무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배울 때에는 많이 간과하곤 한다. 실제 업무로서 접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을 거친 경험은 꽤 가치가 크다. 실제로 데이터 분석가 분야로 이직을 할 때 면접에서 데이터 전처리 작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다.
슬픈 예감은 빗나가질 않았고, 물경력이 걱정되던 그 회사에서 퇴사할 때까지 상용화는 경험하지 못했다. 사내 권력 다툼으로 인한 문제는 일개 사원인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부 사정은 외부에서 알 수가 없으니 커리어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이직을 준비하면서 경력기술서를 앞두고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재직하는 동안 대충한 것도 아니고 발버둥치면서 열심히 했는데 가시적이고 정량적인 결과가 없다는 것이 허무하기도 했다. 나는 내 발버둥의 내용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스스로 생각하고 실행해서 얻은 업무 결과를 포트폴리오로 정리했다. 정리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도 더 많은 시도를 해왔다는 것을 알았고 이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이직할 때에 멘탈 관리가 쉽지 않은데, 이때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멘탈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정리한 포트폴리오로 지원한 이후 서류 합격률이 완전히 달라졌다.
현재 하는 일이 물경력이어서 막막하다면 자신이 쌓고 싶은 업무와의 교집합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을 권한다. 작은 교집합이라도 찾았다면 그 업무의 비중을 점점 높여본다. 이렇게 관련 업무 경력이 쌓이면 시간이 지났을 때 은근히 든든한 힘이 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교집합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의 업무가 자신이 생각하는 커리어패스와 상관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모색하는 시작점이 된다. 현재 커리어에 대한 구체적인 진단이 수반되어야만 앞으로의 커리어패스를 위한 과제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