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거리두기

by 박근필 작가


행복은 인간, 인류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행복이란 뭘까,


언제, 얼마나 행복할까,


왜 행복해야 할까 등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을 하며.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일반인 모두 행복은 초미의 관심사다.


어떤 주제든 대부분 행복으로 귀결된다.



왜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행복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집착, 열광하는 걸까?


'인간은 태어났으면 당연히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여서이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늘 행복해야 하고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보는 거다.


행복한 상태를 정상, 기본값으로 간주한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비정상 또는 불행이라 여긴다.



과연 이것은 괜찮은 걸까?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고 행복하지 않으면 비정상, 불행, 안 좋은 것으로 보는 게 좋기만 한 걸까?



행복을 정의하는 개념은 셀 수 없이 많다.


저마다 행복은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직 누구도 행복을 제대로 정확히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각자의 해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만히 보면 인간이 만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행복이란 단어에


마치 인간이 노예처럼 종속되어 버린 꼴 같다.



행복에 대해 인문학적인 해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앞서 말했듯 행복이란 정확히 무엇이라는 정답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행복에 대한 서은국 심리학 교수의 영상을 우연히 봤다.


행복에 대한 과학적 해석이 담겨 있었다.



골자는 이렇다.


인간은 쾌와 불쾌를 기준으로 살아왔다.


불쾌는 공포나 위기감 등 생존의 위협이 되는 느낌과 감정, 기분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이 곧 생존이다.


예컨대 절벽 가까이에선 불쾌 스위치가 켜져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


반대로 쾌는 좋은 기분으로 이를 추구하는 것이 곧 생존이다.


생존 욕구인 셈.


예컨대 음식을 먹을 때 쾌의 스위치가 켜진다.



이러한 기전과 반응이 인간의 DNA와 유전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도 남아있단다.


그리고 행복은 쾌의 유발이라고 본다.



여기서 핵심 주장이 나온다.


앞서 쾌는 생존 욕구라 말했다.


즉,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생존하기 위해 행복, 즉 쾌를 추구하는 것이지 행복하기 위해 생존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태어났다 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인간은 크게 두 가지로부터 쾌를 느낀단다.


음식과 사람.



쾌를 쉽게 자주 느끼는 사람의 특징은 외향성이 강하다.


외향성인 사람은 내향성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쾌의 스위치가 자주 빈번히 켜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사회성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힘들 때가 고립되고 외로울 때다.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쾌를 느끼는데


외향성이 강한 사람은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 어울릴 기회도 많으니 쾌의 스위치가 켜질 기회 역시 높다는 거다.



이 영상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행복에 관해 깊이 사색했다.


그리고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실체가 없고 정의하기 어렵고 모호한 행복을 굳이 좇으며 살지 말자고.


차라리 직관적인 느낌과 감정, 기분을 추구하며 살자고.


예컨대 기쁨, 즐거움, 만족, 감사, 편안, 평온, 안정, 무탈, 그리고 유쾌함.


행복이란 단어 대신 이 단어들로도 충분할 것 같다.




전에 '쾌'와 '불쾌'에 대해 포스팅을 한 게 기억났다.






인간을 움직이는 건


의지력이나 정신력이 아니다.


오로지 '쾌락 원칙'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하려는 본능이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 신혜원, <오늘도 밑줄을 긋습니다>.




얼마 전 본 강신주 님의 말도 떠오른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행복하려 태어난 게 아니다.


인생, 삶은 고통이다.


고통이 기본이며 고통 없는 순간이 바로 행복이다.


- 강신주.




행복에 있어서만큼은 언어도단이 필요하다.


언어의 길을 끊어야 한다.


언어에 갇히면 안 된다.


행복이란 단어가 오히려 인간을 더 행복하지 않게,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얼마나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웃픈 상황인가.



그냥 지금 괜찮으면 그걸로도 충분하고 정상인데 그런 사람들 마저도


'나 지금 잘 지내고 있는데, 괜찮은 것 같은데,


왜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지? 그럼 나 불행한 건가?'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세상이 비정상 아닐까?


지극히 정상인 사람이 '행복이란 잣대와 기준'에 의해 불행한 사람으로 둔갑되는 세상.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프레임이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와 시선이 그들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다.


행복한 사람이 정상이고 우월한 사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 열등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과 사회 분위기는 바뀔 필요가 있다.



'기쁨, 즐거움 같은 것과 달리 행복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고귀하고 성스러운 거야.


그러니 꾸준히 평생 추구하며 살아야 해.'라는 특별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을 삶의 목적, 목적지, 종착역이라 여기며 사는 것이 어찌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인지도 명확히 모르는 것을 잡겠다며 아등바등 지내다 결국 그것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거나,


만졌는지 만지지 못했는지조차도 모르고 눈을 감을 수 있다 생각하면 허무하기까지 하다.



알기도 어렵고 모호한 행복이란 단어에 매여 살다가,


행복을 바라고 만나길 기대하며 살다가,


정작 현재 오늘 지금 당장 누려야 할 것(소소한 기쁨, 즐거움, 안락함, 만족감, 편안함 등)을 누리지 못하고 놓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이제부터 행복이라는 유별나고 특별하고 대단한 것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보련다.


나의 사전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잠시 지워보는 거다.


행복이란 단어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는 거다.


행복이란 단어와 거리 두기다.


그게 더 행복해지는 지름길 같다.(행복이란 단어가 있다면.)



대신 순간순간 느끼는 긍정의 기분과 감정에 더 충실하고 그것을 온전히 만끽하련다.


좀 더 직관적으로 내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예컨대 쾌, 유쾌, 안녕함을 추구하며 살련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자주 먹으며.



말초적인 쾌락만 추구하며 산다는 게 아니다.


단지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려는 것.


쉽게 말해 기분 좋음,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것.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는 삶,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삶에는 변함이 없다.



행복이란 짐을 덜어내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살다 뭔가 허전하고 행복이란 단어가 그리워지면 그때 다시 그것을 찾아 나서겠다.









아래 영상과 내용 일부를 공유해 드리니 참고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는 제일 유명하고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얘기 중에 하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라는 얘기예요.



최종 인생이 마라톤이라고 한다면,


최종적인 피니시 라인에는 행복이라고 하는 걸 꽂아두고..



이거는 굉장히 비과학적인 생각이고 실제로 사실 좀 터무니없는 얘기예요.


그래서 행복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간파하는데 사실은 꽤 방해가 되는 이야기예요."




"과학을 통해 알게 된 것 누가 행복하냐?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이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데 아주 미묘한 영향을 준다는 얘기예요."




"행복하고 안 한 사람은 우선은 제일 큰 차이가 뭐냐면 외향성 기질적인 외향성의 차이예요.


이 개인적인 특성은 어디에서 오느냐. 유전이에요."




"행복한 것이 좋은 삶이고 우수한 인생이라는 지금 사회적인 이상한 어떤 가치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거를 초연하세요.


난센스고 감정이라고 하는 거는 다 쓸모가 있어요.


행복감도 있고 불행감도 있고 우울감도 있고.."




"누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인간은 일상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은 어디냐?


압도적으로 친구랑 얘기할 때예요.


외향적인 사람이 왜 해피하냐?


외향적인 사람이 무슨 행복 DNA가 머리에 많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천적인 특성이 뭐예요?


우선 사람이라고 하는 자극을 끝없이 추구해요."




"외향적인 사람은 선천적으로 행복을 올리는 스위치를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여러 가지 습성이라든지, 태도 같은 것들을 타고난 약간 행운이 있는 것이죠.


어쨌든 간에 결론적으로 사회적인 경험이 엄청 중요하다."




"쾌와 불쾌의 경험은 우리 600만 년 동안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생존과 재생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유리하거나 좋은 것과 해로운 것들을 가려주는, 즉각적인 시그널이에요.


그래서 크게 얘기했을 때 감정 중에서 쾌 감정들은


'너의 생존에 필요한 거야. 가, 다가서.' 또 다가설 때 '잘하고 있어'를 더 켜줘요.


불쾌의 감정들 역겹다 두렵다 이런 것들은 반대로 나를 피신시키고 보호해 주는 거죠.


제가 절벽 가까이 가면 우린 공포를 느끼는데 이 불쾌나 공포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까불다가 떨어져 다 죽어서 없어요."




"행복은 없어요.


단어예요.


그런데 우리가 행복을 얘기하는 건 뭐냐면 우리에게 쾌를 유발하는 자극 기억 무슨 목표 이런 것들을 모아 가지고 우리가 행복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핵심은 쾌의 유발이에요."




"행복감이 높고 낮은 사람의 특성은 뭐냐면 아주 단조롭게 무미건조하게 얘기하면 그 사람의 뇌에서 이 쾌 전구가 평균적으로 자주 많이 켜지는 사람이에요.


그 이유가 뭐든 간에.


그리고 이것이 잘 안 켜지는 사람이 우리가 검사를 했을 때 행복감이 낮은 사람.


그런데 이 쾌라고 하는 전구는 왜 켜진다고요?


이게 핵심이에요.


인간은 왜 행복감을 느끼는가에 대한 핵심적인 얘기인데 이거는 심심해서 켜지는 게 아니라, 뭐를 위해서 생존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관심을 갖고 쫓아가도록 하기 위한 우리 생물학적으로 오랜 시간 디자인된 일종의 모티베이터예요.


그랬을 때 행복해지고 싶다는 우리 욕심은 이걸 이용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 전구를 자주 켜 주게 해야 되는데 얘는 언제 켜진다고요?


생존 필수품에 되게 익사이팅하고 쫓아가려고 하죠.


그러면 이거를 거꾸로 추론을 해보면 인간이 호모사피엔스가 600만 년의 시간을 살면서 가장 필요로 했던 생존 자원은 무엇이었을까?


이 전구는 그것에 지금 쫓아가는 것이거든요.


그랬을 때 뭐겠어요?


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는 음식이죠.


그래서 먹는 즐거움을 이길 수 있는 즐거움은 거의 없어요."




"두 번째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이고 이거를 생각하시면 행복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팔 할을 이해하신다고 할 수도 있어요.


호모사피엔스라고 하는 우리는 음식만큼 우리의 생사를 좌우했던 또 하나의 자원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그거는 다른 호모사피엔스였어요.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함께 있지 못했던 호모사피엔스는 반드시 죽었어요.


그래서 이 홀로족들은 반드시 멸종했어요.


우리는 누구냐 하면 선별적으로 우리의 선조가 된 분들은 대물림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하신 분들이잖아요.


이분들은 평균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서 상당히 사회적인 스킬 같은 게 높았고 그거를 잘 지내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뇌는 뭐에 제일 무서워하느냐 배고플 때 무섭죠.


또 뭐에 제일 무서워하겠어요.


혼자 있을 때예요.


혼자 있으면 죽었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의 성인의 사망 요인 1위가 뭔지 아세요.


1위는 사회적 고립이에요.


지금도 제일 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고립이에요.


직접적인 사망 요인은 암 뭐 이런 거지만 전체 인구에서 누가 암을 걸리느냐.


혼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걸려요.


암에 걸렸을 때 누가 살아남고 누가 못하느냐. 혼자 사는 사람.


이런 총체적인 데이터들을 다 뒤집어서 보면 단일 요인 중에서 가장 데스 리스크가 큰 거는 여전히 혼자예요.


왜?


혼자는 곧 죽음을 뜻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회적 고립.. 인간의 뇌가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자원은 뭐라고요?


음식만큼 중요한 게 사람이에요.


그러면 앞의 얘기랑 우리가 묶어볼까요?


봤더니 외향적인 애들이 제일 해피해.


도대체 왜 그럴까?


외향적인 사람들은 이 행복 전구를 올리는 대표적인 스위치인 사람을 일상에서 깔아놓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확률적으로 이게 자꾸 켜지는 그런 행운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인데 그건 무슨 얘기냐.


내 행복감이 좀 높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모방이 필요해요.


결국 좋은 차를 지금 사는 게 포인트가 아니라 행복감은 이 뇌에서 만드는 거예요."




"의미 있고 가치로운 삶이 행복한 삶과 똑같은 건 아니에요.


근데 많은 사람들 특히 철학자들이 가치로운 삶은 뭐냐에 대해서 얘기를 한 거를 현대인들이 자꾸 행복과 연관을 시켜요.


그래서 무엇이 더 나에게 중요하다 이건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게 다르다는 걸 알 필요가 있어요.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평가와 이런 것이 너무 중요 사회에서는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와우 해주는 삶을 만들려고 살아요.


다른 사람의 평가에 기반된.


그런데 이런 삶을 추구할수록 많은 경우에는 자기의 경험적인 즐거움과 행복은 줄 가능성이 굉장히 커요.


내 평생 그럴듯한 삶을 만들었는데 난 크게 행복하진 못하다 왜 그럴까?


이 두 갈래에서 이쪽 갈래를 선택을 했지만, 이게 하나라고 생각을 했다는 거죠.


이 둘이 다르다.


행복감은 다른 사람의 평가가 핵심이 아니라 나의 감정이에요.


내가 좋으면 좋은 거예요."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을 바탕으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곧 이것이다, 뭐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건 아니지만, 압축적으로 일상에서 이 장면이 대표한다고 난 생각한다라는 장면이..


좋은 사람들과 밥 먹는 경험.


여기서 키워드는 뭐냐면 "좋은 사람"이에요.


한국 사회에서는 즐겁게 밥 먹기 좋지 않은 사람들이 사실 너무 많아요.



사람이 무조건 행복의 교환권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은 가장 큰 행복의 토큰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스트레스와 불행의 토큰이기도 해요.


요새 왜 혼밥을 하느냐.


혼자 먹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너랑 먹느니 혼자 먹겠다는 멘탈리스트거든요."




"첫 번째 체크 포인트는 뭐냐 하면,


아까 그런 장면, 사람들과 밥을 먹고 담소하고 노는 장면이 내 지금의 일상에서 얼마나 지금 자주 있는지 생각을 해 보셔야 돼요.


내가 아무리 초고속 승진을 했던 뭘 했든 간에 나는 저런 게 없고 혼자서 호텔에서 살면서 맨날 라면 끓여 먹으며 살고 있다.


이런 인생은 여러 영역에서 성취는 높이 했을지는 몰라도 행복감은 절대로 높지가 않아요.



거꾸로 명함에 별것도 없어요.


그런데 1년에 한 번 큰 잔치를 한다는 게 아니라,


가랑비처럼 늘 친구든 가족이든 뭐 연인이든 떡볶이라도 먹고 이게 루틴하게 가득 찬 사람들의 삶은 행복감은 굉장히 높아요."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은 짧은 시간에 저희 개인적인 소견이라기보다는 지난 30년간의 행복 연구에서 누적된 큰 파인딩들의 엑기스.


최근의 진화심리학적인 큰 매크로한 관점을 연결해 봤을 때 결론은 굉장히 뚜렷해요.


행복의 키워드는 사람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행복감을 느끼기 되게 어렵다.


그렇게 이 뇌는 생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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